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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비에도 지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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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비에도 지지 않고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일찍 찾아든 장마는 수시로 비를 뿌려댄다.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는 옛말이 절로 생각나는 요즘이다. 비가 그친 듯싶어 우산 없이 밖에 나갔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당황한 적도 여러 번이다. 비록 비구름을 머리에 이고 사는 장마철이긴 하지만 늘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다. 비가 그친 틈을 타서 짬짬이 꽃을 보기 위해 외출을 감행하곤 한다. 어제는 잠시 비 그친 틈을 타 천변에 나가 보았다. 밤새 내린 비에 물이 얼마나 불어났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맑은 물이 잔잔하게 흐르던 중랑천이 온통 누런 흙탕물로 넘쳐 나며 사납게 소리치며 흐르는 게 보였다. 물살이 빨라지는 수중보 근처에 떼지어 모여들던 민물가마우지는 보이지 않고 외다리로 선 채 묵상에 잠긴 듯한 왜가리 한 마리가 이채롭게 느껴졌다.

중랑천의 수위가 궁금하긴 했지만 정작 내 관심은 꼬리명주나비에 쏠려 있었다. 천변에 조성해 놓은 쥐방울덩굴 군락지에 서식하는 꼬리명주나비를 보고픈 마음이 더 컸다. 쥐방울덩굴 군락지는 구청에서 관리하는 덕분에 올해도 어김없이 무성하게 어우러져 꽃을 피우고 쥐방울 열매가 맺혔지만, 비 온 뒤라서인지 나비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다른 나비 몇 마리를 일별하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꼬리명주나비를 보긴 했으나 아쉽게도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다. 대신에 산책로의 나무들과 천변에 핀 꽃들을 살피며 천천히 천변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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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몰아치는 비바람에 시달리면서도 꽃을 피우고 제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때론 안쓰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무들은 두꺼운 세포벽을 지니고 있어 웬만한 바람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거기에 세포벽엔 철근 역할을 하는 셀룰로오스와 시멘트 역할을 하는 리그닌이란 화학물질이 있어 비바람을 꿋꿋이 이겨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단단히 비바람에 맞설 채비를 한 덕분에 나무들은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하여도 장마는 사람만이 아니라 나무나 풀에게도 힘든 시기인 것은 분명하다.

비바람과 맞서며 의연히 서 있는 나무들을 볼 때면 '은하철도 999'의 원작 <은하철도의 밤>으로 유명한 일본 아동문학가 미야자와 겐지가 쓴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시가 생각나곤 한다. 이 시의 모델은 겐지의 마을 근처에 살았던 사이토 소지로라는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 마을 사람들로부터 폭행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내고 이웃을 돌보아 온 그가 마을을 떠날 때, 기차역에는 그를 배웅 나온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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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네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

이 시를 읽으며 비에도, 바람에도,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면서도 칭찬도 미움도 받지 않는 사람의 모습에서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당산목 같은 한 그루의 노거수를 떠올리는 것은 나뿐일까? 우리는 저 나무와 닮은 사람을 볼 때 고단한 저마다의 삶에 위로를 받고 비바람에 맞설 용기를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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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