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공감능력치가 상위 1%에 해당하는 탓에 세상 모든 기쁨이 내 기쁨이 되었다가도, 때론 세상 모든 슬픔과 괴로움이 나의 그것이 된다. 가까운 친구나 직장 동료가 어려움을 토로하면 하루 종일 마음이 아프고, 내가 무엇을 해줄 수는 없는지 계속 생각하며 전전긍긍한다. 내 삶을 챙기고 내 일 하기도 바빠서 거절할까, 이번 일은 알아서 하라고 말할까 수십 번 고민하다가 결국 두 팔 걷어붙이고 앞장을 섰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일과 감정에 두루두루 마음이 가서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좋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떨까. 높은 공감능력이 항상 좋은 쪽으로만 작동하는 것일까. 앞의 첫 번째 경우처럼 리더에게 요구되는 감정노동을 생각한다면 구성원들에게 항상 공감하라고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최근 조직의 리더들에게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구성원들의 성과와 더불어 감정까지 챙겨야 하는 역할이 맡겨지면서 심리적 부담이 가중되는 중이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이렇게 해주지 않으면 리더에게 실망할지도 몰라.’, ‘지금은 사람이 부족해. 일단 잘 붙잡아야 하니까 투덜대면 잘 들어주자.’라며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기 어려워 에너지를 쏟게 된다. 이렇게 리더에게 부담되는 가중은 다시 심리적 압박감과 번아웃으로 이어지거나, 지친 나머지 되레 구성원에게 냉담해지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두 사람이 겪고 있는 감정을 공감피로라고 한다. 이는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돌보거나 깊이 이입되어 정서적으로 전염이 되는 부정적인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상황을 직업적으로 겪어야 하는 상담사, 호스피스 간호사, 의사와 같은 사람들은 타인을 돌보고 공감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꽤 괜찮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들에겐 온정적 분리 혹은 자비로운 분리(Compassionate Detachment)라고 불리는 전략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목도할 때 자신에게 전달되는 감정을 조절하고 거리를 두는 것으로, 이 전략을 잘 사용하면 상대의 감정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계없이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람은 대인관계에서 건강한 결정을 내리고, 갈등을 다뤄야 하는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하고, 감정적으로 부담스러운 어떤 상황이라도 건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염없이 고충을 늘어놓는 팀원의 말을 듣는 중이라면 ‘우리 팀원들 사이에 관계적인 이슈가 있군. 내가 미처 몰랐던 부분인데.’라며 팀워크를 점검하는 데 유용한 정보를 얻는 자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혹시 본인 스스로 감정적인 애착을 지나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고, 대화를 나눌 때 주의 깊게 경청하고 반응해서 상대방에게 되레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상대방에 대한 동정심과 이타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의식적인 공감을 통해서 건강한 방식을 추구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연습하고 찾아가야 한다.
이것은 진정성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어려움을 정서적으로 충분히 느끼거나 공감하지 못해도 그의 어려움을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겠다고 내가 같이 물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때 할 일은 그가 스스로 헤엄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때는 구명보트를 던져주면 되는 것이다. 물에 뛰어들어도 되는 때는 내가 수영하는 법을 알 때뿐이다. 우리는 정서적으로도 전략과 기술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게 내가 살고, 상대방을 살리는 일이다. 내가 먼저 건강해야 주변도 돌볼 수 있는 법이다.
김아름 플랜비디자인 수석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