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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사람들 밥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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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사람들 밥 먹어야지

김원상 플랜비디자인 수석컨설턴트이미지 확대보기
김원상 플랜비디자인 수석컨설턴트
“오늘은 쉬어. 눈 엄청 많이 와”라는 친구의 메시지에 “그럼 밥은? 사람들 밥 먹어야지”라고 응수한 한 배달원의 문자가 한때 화제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캡처본으로 올라온 이 짧은 대화는 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묘한 울림을 남긴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는 말이 진부하지 않게 들리는 순간이다. 누군가는 웃고 넘길 대화지만, 이 안에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직업정신’이 살아 숨 쉰다. 단순히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과 생존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각이 담긴 말이기 때문이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삶을 여덟 단계로 나누고, 각 시기에 해결해야 할 심리사회적 과업이 있다고 보았다. 그중 중년기(40대~60대 중반)의 핵심 과업은 ‘생산성(generativity)’이다. 이는 단지 일에서의 성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와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감, 기여, 돌봄의 감정이다. 이 과업을 충족하지 못하면 개인은 성장에서 ‘정체(stagnation)’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이 이론이 발표된 20세기 중반과 달리 오늘날의 노동환경은 훨씬 더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중년 이전의 청년들에게도 유사한 ‘정체’ 현상을 야기하고 있다.

예컨대 “회사는 돈 버는 곳일 뿐이다”라는 식의 태도는 단순한 무기력이나 책임 회피를 넘어 일 자체가 개인의 정체성(identity)이나 성장과 분리돼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이는 현대의 청년들이 ‘일’에서 의미와 기여를 찾기 어렵다는 구조적 문제이자 심리적 결과이기도 하다. 일의 가치가 단지 임금으로만 환원되고, 사회적 평가는 ‘돈 많이 버는 일’에 집중되며, 조직은 구성원의 성장을 위한 여지를 점점 더 축소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일을 통해 성장한다”는 말은 청년들에게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우선 ‘성장 정체’가 특정 세대나 나이에 국한된 현상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이들도, 청년도, 중년도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의 벽을 마주한다. 그 차이는 ‘무엇을 성장이라 부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중년에게 성장이라면 ‘후속 세대에 대한 기여’일 수 있지만, 청년에게는 ‘일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사회와 연결되는 감각’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배달원의 “사람들 밥 먹어야지”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의 일이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누군가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연결감은 직업정신의 뿌리가 되고, 이는 곧 성장의 자원으로 작용한다. 조직이 청년 구성원들에게 ‘의미 있는 일’을 주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더 이상 사치가 아니다. 일의 의미는 반드시 거창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작은 기여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체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정체’라는 감정을 겪을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다. 성장 정체는 실패가 아니다. 그건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고,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이 일이 내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 질문은 교육, 독서, 멘토링 또는 단순한 대화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문제는 많은 조직이 이런 성찰의 순간을 ‘게으름’이나 ‘동기 부족’으로 오해하고, 곧바로 동기부여 캠페인이나 마인드셋 강화를 처방한다는 점이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단지 효율이 높은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군가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그로 인해 자신도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이 함께해야 지속 가능하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렇다면 조직이, 사회가 해줘야 할 역할은 분명해진다. 성과 이전에 의미를 붙잡게 해주는 것. 직업정신이란 어떤 선언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 연결감에서 싹트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 밥 먹어야지.” 이 짧은 말은 어떤 구호보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나의 일이, 누군가의 삶에 필요하다는 사실. 그곳에서 성장의 서사는 시작된다.


김원상 플랜비디자인 수석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