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이미지 확대보기에너지 전환 과정에서는 암전(暗轉)이 없어야 한다. 여기서 암전은 갑작스러운 정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필요한 전력이 제때 공급되지 못하는 것, 가격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는 것, 전력 품질이 불안정해지는 것—이 모두가 암전이다.
에너지 전환이 산업의 심장을 멈추게 한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전환이 아니라 치명적인 단절이다.
지금 세계는 수소·전력·AI라는 세 축이 맞물려 돌아가는 새로운 질서로 이동하고 있다. AI는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지만, 기존 전력망은 한계에 도달했다.
이 거대한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다음 시대의 산업 경쟁력과 국가 안보의 향방이 결정된다. 수소는 그 한계를 보완할 에너지 저장 및 전환 수단으로 부상했다.
문제는 현실과 정책 사이의 괴리다. AI시대로 빠르게 나아가면서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와 각 부문의 전기화로 인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제는 단순히 '얼마나 생산하느냐'보다 '어떤 전기를, 언제, 어떤 품질로 공급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미래의 전력은 안정적이고(Stable), 유연하며(Flexible), 가격 경쟁력 있고(Affordable), 탄소 배출이 낮아야(Clean) 한다—이 네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에너지 전환 정책은 이 사중주를 조화롭게 연주하지 못하고 있다. 재생에너지는 간헐성이라는 구조적 한계에 부딪혔고, 원자력은 건설 속도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전력 생산 설비는 늘어나는데, 정작 쓸 수 있는 전기는 부족한' 기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수소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 수소는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흡수하고 필요할 때 전력으로 되돌리는 에너지 캐리어이자 거대한 배터리에 비유할 수 있다. 전동화가 어려운 고온 산업 공정에서 수소는 사실상 유일한 탈탄소 해법이다.
결국 이는 ‘존재하지 않는 수소’를 기준으로 ‘현재의 전력 시장’을 설계하는 오류다.
국내에서 대규모 그린수소를 생산하기에는 입지·계통·비용 측면에서 물리적 제약이 뚜렷하다. 국산화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수소는 본질적으로 글로벌 에너지다.
중동, 호주, 북미 등에서 생산된 경제적인 청정수소를 유연하게 활용하는 포트폴리오가 필수적이다. 아직 산업적 대량 공급과는 거리가 먼 수준에서, 대량 수요가 불가피한 시장을 설계한다면, 전력 단가는 상승하고 국내 산업의 국제 경쟁력은 순식간에 와해될 것이다.
활용 부문에서도 이미 검증된 자산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수십 년간 정부와 기업이 살과 뼈를 갈아 넣은 한국의 연료전지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상업화 단계에 있다.
현재 수백 메가와트 규모의 발전용 연료전지가 국내에서 가동되며 전력계통의 안정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분산에너지 시대를 위해 준비된 검증된 자산이다. 그러나 정책이 특정 수소만을 전제하면서 이 산업 생태계는 고사 위기에 처했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책이 기술을 쓰지 못하게 가로막는 격이다. 국산과 수입 에너지를 이분법으로 나눌 때가 아니다. 핵심은 단 하나—'지금 당장 산업 현장에서 쓸 수 있는가'이다.
세계 에너지 시장은 이미 '공급의 경쟁'을 넘어 '설계의 전쟁'으로 진입했다. 미국 블룸에너지의 사례는 시사적이다. 이들은 구글, 애플, 이베이 등 빅테크 기업의 데이터센터에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전력 공급을 제공한다.
천연가스에서 시작해 청정수소로 유연하게 전환되는 연료 구조가 핵심이다. 블룸에너지는 연료전지를 판 것이 아니라 'AI 시대의 무정전 전력 시스템'을 설계해 팔았다.
이미 확보된 기술로 오늘의 수요에 즉각 대응하면서, 미래의 연료로 향하는 가교를 놓은 것이다. 파편화된 부처별 접근에서 벗어나 기술과 수요를 통합하는 국가 차원의 에너지 아키텍처가 시급한 이유다.
에너지 전환의 성패는 지속 가능성에 있고, 그 전제 조건은 끊기지 않는 공급이다. 좋은 에너지가 아닌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수소의 출처보다 청정성과 안정성을 기준으로 유연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야 한다.
전력·수소·AI를 통합하는 국가 차원의 에너지 시스템 설계로 전환해야 한다. 이제 에너지 정책은 부처의 영역이 아니라 국가 대전략의 영역이다. 우리가 설계하는 것은 단순한 전력망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 산업 지도다.
그 지도 위에 암전이라는 빈틈은 허용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