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이미지 확대보기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 박동이 약해져 가고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던 현장이 이제는 청년이 떠나고 안전사고가 반복되며, 에너지 비용과 탄소 규제가 동시에 몰려오는 벌판에 허허로운 모습으로 서 있다.
노후산단 문제는 일부 경쟁력을 잃어가는 산업의 구조조정이 아니라 국가 제조 생태계 전체를 건 거시적 재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도 산업단지를 디지털화·무탄소화·에너지 자립화하는 '스마트그린산단' 사업을 추진 중이며, 2026년 공모에는 AX 실증산단, 에너지 자급자족 인프라가 핵심 과제로 포함됐다.
이 사업은 AI 전환·전력·탄소중립·청년 정주가 결합된 입체적 복합전략이어야 한다. 세 가지 전략을 제언한다.
첫째, 전력 '소비처'에서 전력을 설계하는 '산업 플랫폼'으로의 전환이다. AI·데이터센터 시대에 제조업 경쟁력은 값싼 부지가 아니라 안정적 계통 연결과 재생에너지·가스·원전·수소를 조합하는 설계 능력에서 나온다. 중국은 동부의 컴퓨팅 인프라와 서부의 에너지원을 연계하는 '동수서산(東數西算)' 전략을 추진 중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도 제도적 돌파구가 있다. 2025년 6월 시행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에 따라 정부는 이미 울산, 부산·전남·제주 등 7개 지역을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으로 지정했다. 전력계통영향평가 간소화, 배전 손실률 인하 등 실질적 인센티브가 뒤따른다. 그런데 이 제도의 1차 수혜 대상은 본래 산업단지다. 그런데 정작 전력 수요가 가장 큰 노후 제조업 거점들이 특구 지정 대열에서 뒤처져 있는 것이다.
더는 활용을 검토할 제도가 아니다. 선점 경쟁이 이미 시작된 정책 자원이다. 산단 내에서 신재생에너지나 부생가스, 청정수소로 전력을 직접 생산·소비하고, 남는 전력은 유연하게 거래하는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산단이 거대한 '전력 소비처'에서 '에너지 플로우 디자인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다.
둘째, 탄소 무역장벽 극복과 석유화학 산업의 대전환이다.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ESG 공시 압박은 고탄소 구조의 중소 제조기업에 가장 먼저 타격을 입힐 것이다. 울산·온산, 여수 등 석유화학 기반 산단의 가동률 저하는 단순 불황이 아닌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의 신호탄이다.
최근 석유화학 '사업재편 1호 프로젝트'에 금융·세제·원가를 합쳐 2조 1천억 원 규모 지원 패키지가 승인된 것은 방향성은 옳지만, 개별 기업 단위 지원만으론 부족하다. 필요한 것은 산단 단위의 '전환금융' 생태계다. 세계경제포럼은 2050년까지 탄소다배출 업종에 전 세계적으로 약 30조 달러가 필요하다고 추산했고, 정부도 2026년까지 전환금융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계획이다.
NCC 전기화나 수소환원 공정 전환처럼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에는, 정책금융 기반 민관협력펀드와 그린본드를 넘어선 '전환본드' 발행, 배출권거래제 유상할당 수익의 재투자가 패키지로 결합되어야 한다.
셋째, 청년이 머무는 '직·주·락' 브랜드 산단 구축이다. 회색빛 공장만 빽빽하고 문화·주거·돌봄 인프라가 전무한 산단은 청년에게 외면받는다. 다만 한 실증연구는 비수도권에서 문화 인프라보다 양질의 일자리 환경이 청년 유입의 더 강한 동인임을 보여준다.
즉 문화시설을 추가하는 게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와 '거주의 질'이 동시에 충족돼야 청년이 머문다. 스웨덴 말뫼는 몰락한 조선소 부지에 대학을 유치하고 주거·교육·여가를 묶은 주택단지를 결합해, 1990년 23만 명까지 줄었던 인구를 34만 명으로 되돌리고 일자리 7만 개를 새로 만들어냈다. 독일 도르트문트와 바르셀로나 22@도 같은 방식으로 지역 경쟁력을 회복시켜왔다.
울산 길천산단 역시 올해 말 구조고도화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2027년 1월 고시를 거쳐 10년간 문화·복지시설 확충과 업종 전환을 추진할 예정이다. 산단 내 용도지역 변경을 과감히 허용해 복합용지를 확대하고 미니 신도시급 배후 인프라를 조성하는 것이 인구 소멸을 막는 열쇠다.
실제 현장의 경고음은 분명하다. 2025년 2월 온산 산단에서는 유류 저장탱크 폭발로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이런 안전사고는 노후 설비와 무관하지 않다. 인프라 낙후와 환경 부담이 청년 기피와 안전사고 반복의 근본 원인이다.
노후산단은 허물어야 할 청산 대상이 아니라, AI가 작동하고 전력망이 최적화되며 탄소 배출을 낮추는 동시에 청년이 모여드는 '대한민국 제조업 2.0'의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 방치하면 산업 공동화를 맞겠지만, 거시적으로 재설계한다면 향후 60년을 책임질 두 번째 도약이 이곳에서 시작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