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김대호 반도체 열전 (67) | ASML: 영원한 ‘슈퍼 을(乙)’의 위대한 헤게모니
반도체 업계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기업을 하마만 들라면 단연 ASML일 것이다. 오늘날 첨단 산업의 최전선에서, 인류가 가닿은 가장 정밀한 기술의 경계에는 어김없이 네덜란드 남부의 작은 도시 펠트호벤(Veldhoven)에 본사를 둔 하나의 기업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노광(Lithography) 공정의 절대 독점자, ASML(Advanced Semiconductor Materials Lithography)이다.
흔히들 반도체 공급망의 정점에 선 이 ASML을 가리켜 '슈퍼 을(乙)'이라 부른다. 값비싼 완제품을 파는 갑(甲)들인 TSMC, 삼성전자, 인텔조차도 ASML의 장비 없이는 3나노, 2나노 이하의 초미세 회로를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완벽한 독점적 기술력은 전통적인 갑을 관계의 문법을 완전히 해체해 버렸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주문이 밀려 있으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전무후무한 지위. ASML이 걸어온 길은 단순한 기업의 성장을 넘어, 인류 과학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 온 위대한 도전의 연대기였다.
ASML의 태생은 화려하지 않았다. 1984년 네덜란드의 거대 가전·IT 기업인 필립스(Philips)와 반도체 장비 업체인 ASM 인터내셔널(ASMI)의 50대 50 합작 법인으로 출발했다. 출발 당시의 사명은 'ASM 리소그래피(ASM Lithography)'였다. 본사 건물이랄 것도 없고 필립스 사옥 귀퉁이의 낡은 창고에서 몇 안 되는 엔지니어가 모여 머리를 맞댄 것이 시작이었다. 초창기의 나날은 처절한 생존 투쟁의 연속이었다. 거대 자본을 투입하고도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고, 기술적 난관에 부딪히며 파산 위기 직전까지 몰렸다. 모기업인 필립스조차 자금 지원을 망설일 만큼 미래는 암울했다. 전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은 일본의 거인들인 니콘(Nikon)과 캐논(Canon)이 꽉 잡고 있었고, 풋내기 합작사에 불과했던 ASML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였다.
위기는 기술에 대한 집념으로 돌파되었다. 1991년 출시된 웨이퍼 노광 장비 'PAS 5500' 시리즈는 업계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압도적인 생산성과 정밀도를 자랑했던 이 장비는 전 세계 주요 반도체 제조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ASML에 처음으로 안정적인 흑자와 생존의 기반을 안겨주었다. 이를 발판으로 ASML은 1995년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AEX)와 미국 나스닥(NASDAQ)에 성공적으로 상장하며 독립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자본시장의 막대한 자금을 연구개발(R&D)에 쏟아부을 수 있는 날개가 비로소 돋아난 것이다.
성장에 취해 안주할 법도 했지만, ASML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가올 나노미터의 전쟁터를 내다보았다. 2000년대 들어서며 ASML은 진정한 의미의 '게임 체인저'로 거듭났다. 한쪽에서는 웨이퍼를 측정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노광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여 생산성을 극대화한 '듀얼 스테이지(Dual-stage) TWINSCAN' 시스템을 선보였다. 이어 미국의 광학 장비 업체인 실리콘밸리 그룹(SVG)을 전격 인수하며 북미 시장의 교두보를 다졌고, 렌즈와 웨이퍼 사이에 물을 채워 빛의 굴절률을 높이는 액침(Immersion) 노광 기술을 선도하며 일본의 라이벌들을 차례로 제압했다. 200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글로벌 노광 장비 시장에서 ASML은 명실상부한 1위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진짜 시험대는 그 이후에 펼쳐졌다. 빛의 파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가시광선과 자외선을 넘어, 파장이 극도로 짧은 13.5나노미터의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violet) 노광 장비 개발이라는 전인미답의 영역에 도전한 것이다. EUV 개발은 너무나 방대한 비용과 인류가 일찍이 마주하지 않은 극단의 물리학적 난제들을 동반했다. 수조 원에 달하는 개발비를 감당하기 위해 ASML은 당시 주 고객사였던 인텔, TSMC, 삼성전자 등으로부터 이례적인 지분 투자를 유치하며 일종의 '글로벌 반도체 연합군'을 결성했다. 리스크를 공유하고 생태계를 함께 구축하는 이 전략은 주효했고, 수십 년간의 실패와 집념 끝에 마침내 EUV 상용화라는 역사적 성업을 이루어냈다. 이 순간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재편되었다.
ASML은 파장이 13.5nm인 기존 EUV를 넘어, 해상도를 대폭 높인 차세대 고수차(High-Numerical Aperture) EUV 장비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이 장비 한 대의 가격은 수천억 원에 달하며, 전 세계에서 이 초고난도 장비를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기업은 지구상에 오직 ASML뿐이다. 독일의 광학 전문 기업 칼자이스(Carl Zeiss)가 빚어내는 세계에서 가장 평평하고 정교한 특수 거울과, 영하의 극한을 다루는 첨단 기술력이 결합되어야만 비로소 하나의 장비가 탄생할 수 있다. 이처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적 진입장벽은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격화 속에서도 ASML이 가진 독보적인 지정학적·경제적 가치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있다.
40년 전 네덜란드의 작은 창고에서 시작해 반도체 미세 공정의 지도를 바꾼 이들은, 오늘도 인류가 나아갈 나노미터의 한계를 최전선에서 증명하고 있다. 영원한 '슈퍼 을'로서 전 세계 반도체 생태계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ASML의 행보는, 거대한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이 나아가야 할 궁극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묵직한 울림으로 던져주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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