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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다시 백운대를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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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다시 백운대를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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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백운대를 오르다, 백승훈 시인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배낭을 메고 북한산으로 향했다. 두 달 만의 산행이다. 초록 일색이던 나무들이 조금씩 오색으로 물들어 가는 가을은 일 년 중 등산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붉게 익어가며 빛나는 열매들과 가을꽃들의 맑고 짙은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가을 산의 유혹도 유혹이지만 그동안 병원 입원과 수술과 치료를 받느라 떨어진 체력도 점검해 보고 가을이 오는 산의 풍광도 즐길 생각으로 나선 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산을 오를 때마다 이 산을 몇 번이나 더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영원할 수 없는 목숨이니 언젠가는 끝이 있을 터, 오를 수 있을 때 열심히 오르자는 다짐과 함께.

가을로 접어들면서 비가 잦아진 탓인지 계곡의 물소리가 한결 생동감 있게 들리고 수량이 늘어난 만큼 여기저기 새로운 폭포들도 눈에 띈다. 하루재를 오르는 동안 동이 트고 인수봉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섰다. 멀리서 바라보면 바라보는 대로, 가까이 다가서면 다가서는 만큼 든든하게 나의 뒷배가 되어주는 산, 그 품에 들면 힘든 수고도 보람으로 바뀐다. 아직 햇빛이 닿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나뭇잎들이 한결 윤기를 잃은 듯하다. 처서도 지났고 찬 이슬 내린다는 백로도 지났으니 겨울 채비를 하는 모양새다. 나뭇잎들이 꺼칠해질수록 반짝이며 빛나는 것들이 있으니 바로 붉은 열매들이다. 봄에 자잘하고 수수한 색의 꽃을 피웠던 나무들이 내단 열매들이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내는 때가 바로 요즘이다.

명랑하게 재잘거리며 산을 내려가는 계곡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작은 풀꽃들이 눈에 띈다. 마음이 절로 넉넉해져서 길섶에 피어 있는 꽃들과 일일이 눈을 맞춘다. 이제 끝자락에 이른 물봉선과 보라색 꽃향유, 쑥부쟁이와 조밥나물, 여뀌꽃까지 소슬한 가을꽃들의 속삭임이 걸음을 재촉한다. 산을 오르는 사이, 처음 인수봉의 정수리에 닿았던 햇살이 어느새 산 중턱까지 내려와 나무 사이로 은빛 햇빛을 뿌려놓는다. 저 햇빛과 바람이 곧 나뭇잎에 오색의 물감을 곱게 들일 것이다. 그 단풍 빛이 환한 날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산을 오르는데 북한산장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나무 계단이 새로 설치되어 산행이 훨씬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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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봉 암문에 이르렀을 때 성벽 돌 틈 사이에 피어난 한 떨기 구절초가 나를 반긴다. 아홉 번 죽었다 다시 피어나도 첫 모습 그대로 피어난다는 구절초는 때 묻지 않은 순백의 꽃잎과 향기도 그윽하여 내가 좋아하는 꽃 중의 하나다. 두 달 만에 오른 백운대엔 여전히 태극기가 펄럭이고,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구름바다는 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정상 아래 너럭바위엔 풍경을 즐기며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도 보이고, 배낭에 메고 온 간식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구름에 잠겨 지워져버린 도시의 풍경들을 발 아래 두고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고 서면 이보다 더 상쾌할 수가 없다. 힘들게 산을 오른 노력을 보상받는 느낌이다.

칼럼니스트 김교석은 ‘아무튼 계속’이란 책에서 “별다른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재능, 그것은 바로 성실함이다”라고 했다. 산을 오르는 일이야말로 성실함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자연과 벗하며 산을 오르고 나면 힘들었던 산행의 수고도 잊을 만큼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건강한 삶이란 특별한 게 아니다. 남의 도움 없이 자신이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건강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언제까지 산을 오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이렇게 산을 오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자연과 벗하며 지낼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 여름날 아팠던 기억들을 산에 부려 놓고 하산하는 길,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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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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