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 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 난 내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박노해의 시 ‘가을볕’ 전문
가을엔 누구나 시인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시인이 되지는 못해도 좋은 시를 찾아 읽는 것도 가을의 낭만을 제대로 즐기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시인은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리고, 자신의 슬픔과 상처 난 욕망,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말린다고 했다. 가을볕 아래 서본 사람은 안다. 가을볕은 너무도 투명하여 그 무엇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볕 아래에선 고추를 말리고 빨래를 말리듯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어 말리는 것뿐이라는 것을.
이미지 확대보기
이미지 확대보기
이미지 확대보기
이미지 확대보기
이미지 확대보기
이미지 확대보기초가집 지붕 위에, 마당의 멍석 위에 고추 말리는 풍경은 가을의 대표적인 전원 풍경 중 하나지만 농촌에서 나고 자란 나는 고추 말리는 일이 얼마나 번거롭고 힘든 일인지를 안다. 초가을의 따가운 햇볕과 선선한 바람은 고추 말리기에 알맞다. 하지만 고추 말리기는 낮에는 널어놓았다가 저녁이면 거둬들였다가 다시 널기를 며칠이나 반복해야만 하는 고된 작업이다. 도중에 비라도 한 번 맞으면 큰일이라 고추가 마를 때까지는 늘 신경을 써야 한다. 요즘은 건조기가 있어 고추 말리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맛이나 품질 면에서 가을볕에 잘 말린 태양초엔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바람을 타는 가냘픈 코스모스와 보랏빛 쑥부쟁이 같은 가을꽃들, 봄날 흰나비가 내려앉은 듯 눈부시게 꽃을 피웠던 산딸나무도 분홍색 열매를 잔뜩 내어 달고 조용히 가을볕을 쬐고 있다.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가을볕이 좋은 이유는 여름에 비해 낮아진 자외선 강도와 아침저녁으로 불어주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 여름보다 덜 뜨겁고 봄보다는 따뜻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햇볕을 쬐면 면역력도 높아지고 우울증 예방에도 좋다고 하니 시간 나는 대로 가을볕 속을 걸어볼 생각이다. 까닭 없이 쓸쓸해지기 쉬운 계절, 투명한 가을볕 속을 걸으며 이 가을을 온전히 즐기고 싶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지만 지구온난화로 기후가 바뀌면서 가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원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처럼 가을볕은 자연이 건네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내게 몇 번의 가을이 더 남아 있을까 생각하면 가을볕 한 점이 더없이 귀하게 느껴진다. 계절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고 간다. 우리가 무심해도 가을은 오고, 울 밑의 국화는 어김없이 피어 맑고 그윽한 향기로 가을 뜨락을 넉넉히 채워줄 것이다. 하지만 꽃 보는 일이 그러하듯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가을볕 한 줌도 귀한 선물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미지 확대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