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리밸런싱 유예가 부른 ‘삼전닉스’ 폭락의 역설
이미지 확대보기12세기 프랑스 신학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남긴 성찰에서 유래해, 영국의 문학가 새뮤얼 존슨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거치며 인류의 보편적 경구로 자리 잡은 말이다. 이 격언이 오늘날 자본시장과 경제정책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소환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정책 입안자의 의도가 아무리 순수하고 선량할지라도, 시장의 냉혹한 가격 발견 기능과 유인 체계를 거스르는 개입은 반드시 의도치 않은 파국으로 귀결된다는 역설 때문이다. 최근 한국 증시를 강타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이른바 ‘삼전닉스’의 주가 폭락 사태는 이 고전적 명제가 어떻게 현실의 비극으로 작동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생생한 교과서다.
사태의 발단은 주식시장 안정과 개인 투자자 보호라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선의’였다. 국내 증시의 고질적 저평가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시장의 하방 경직성을 확보하겠다는 명분 아래, 당국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기계적 매도를 멈추는 ‘리밸런싱(자산배분 조정) 유예’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주가가 오를 때 목표 비중을 맞추기 위해 국민연금이 우량주를 내다 파는 관행이 증시 상승의 발목을 잡는다는 여론을 의식한 조치였다. 전략적 자산배분(SAA) 허용 범위를 느슨하게 적용하거나 리밸런싱 주기를 인위적으로 늦춰서라도 수급의 방파제를 쌓겠다는 구상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개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지수를 떠받치겠다는 애국적 결단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장은 정책 당국의 선의를 박수로 맞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인위적인 리밸런싱 유예 조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 폭락의 가장 치명적인 방아쇠(Trigger)로 작동했다. 왜 시장을 구하겠다는 구원투수의 등판이 오히려 대참사의 서막이 되었는가. 그 이면에는 자본시장의 생리를 망각한 세 가지 치명적인 오판이 자리 잡고 있다.
둘째, ‘잠재적 매물 폭탄(Overhang)’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했다. 리밸런싱 유예는 매물 출회를 영구히 소멸시키는 마법이 아니라, 미래로 고통을 이연(Deferral)시키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연기금의 자산배분 원칙상 특정 자산이나 종목군의 비중이 한도를 넘어서면 언젠가는 반드시 팔아야 한다. 지금 당장 팔지 않는다는 것은, 훗날 시장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야 할 매물의 절대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뜻이다. 영리한 시장 참여자들은 이 구조적 모순을 즉각 간파했다. 유예 기간이 끝나는 순간, 혹은 지수가 꺾여 포트폴리오 위험 한도가 임계점에 달하는 순간 국민연금조차 투매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는 공포가 확산되면서, 기관과 외국인은 국민연금보다 한발 앞서 ‘선제적 투매(Front-running sell-off)’에 나섰다. 매도를 막으려던 조치가 오히려 시장 전체의 매도 공포를 자극해 주가 폭락을 앞당긴 것이다.
셋째, 고점 매도 기회를 상실한 국민연금이 정작 폭락장에서는 ‘저가 매수 여력(Dry Powder)’을 잃어버리는 자승자박에 빠졌다. 리밸런싱의 진정한 가치는 상승장에서 비싸게 판 현금을 비축해 두었다가, 시장이 비이성적 공포로 급락할 때 구원투수로 등판해 주식을 사들이는 데 있다. 하지만 리밸런싱 유예로 인해 국민연금은 상승 국면에서 현금을 확보하지 못했고, 국내 주식 비중이 이미 한계치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반도체 업황 피크아웃 우려와 글로벌 매크로 충격이라는 파도를 맞았다. 막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폭락할 때, 시장의 버팀목이 되어야 할 국민연금은 이미 한도가 꽉 차 손발이 묶인 식물 기금이 되어 있었다. 고점에서 팔지 못하니 저점에서 사줄 수도 없는 이 기괴한 수급의 불구화야말로 관치(官治)가 부른 참극의 핵심이다.
여기에 더해 국내 증시 시가총액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구조적 특성이 화를 키웠다. 글로벌 패시브 자금과 인덱스 펀드들에게 한국 증시는 곧 ‘삼전닉스’와 동의어다. 국민연금의 비정상적인 리밸런싱 유예로 한국 증시의 수급 구조가 왜곡되자, 글로벌 알고리즘 매매와 패시브 자금은 유동성이 가장 풍부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집중 타격하며 포지션을 축소했다. 시장 전체를 안정시키겠다는 어설픈 개입이 대한민국 대표 반도체 투톱의 주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경제학의 거장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저서 『노예의 길』에서 국가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장의 가격 메커니즘을 통제하려는 순간,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경고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 또한 정치가와 정책 입안자가 가져야 할 덕목은 자신의 의도가 순수했음을 강변하는 ‘신념윤리’가 아니라, 그 결정이 초래할 파국적 결과까지 냉정하게 계산하고 책임지는 ‘책임윤리’라고 갈파했다.지금 우리의 연금 당국과 금융 정책 결정자들에게 결여된 것이 바로 이 책임윤리다. 주가지수 하락을 막아보겠다는 단기적 선의, 여론의 비판을 피해보겠다는 정치적 타협이 수백조 원의 국민 노후 자금을 위험에 빠뜨리고, 애꿎은 개인 투자자들에게는 ‘삼전닉스 폭락’이라는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교각살우(矯角殺牛), 쇠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인 격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달콤한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이번 삼전닉스 주가 폭락 사태가 남긴 뼈아픈 교훈은 단 하나다. 시장을 이기려는 오만한 선의를 거두고, 연기금 본연의 원칙과 냉정한 시장 규율로 돌아가는 것만이 더 큰 재앙을 막는 유일한 길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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