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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의 성지’ 프랑스의 비명… 아시아 공세에 ‘백기’ 든 유럽 산업 심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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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의 성지’ 프랑스의 비명… 아시아 공세에 ‘백기’ 든 유럽 산업 심장부

공장 폐쇄 30% 폭증하며 산업 기반 붕괴 위기… 한국 수출 전선에도 ‘경고등’
에너지 고비용과 美 관세 장벽 ‘이중고’… ‘프랑스 2030’ 재건책 실효성 의문
세계 최대 철강사인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 SA)은 최근 프랑스 북부 7개 사업장에서 600명 규모의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세계 최대 철강사인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 SA)은 최근 프랑스 북부 7개 사업장에서 600명 규모의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사진=연합뉴스
유럽의 산업 자부심으로 불리던 프랑스 제조업이 미·중 패권 다툼과 에너지 비용 상승이라는 거대한 파고를 넘지 못하고 고사 위기에 처했다. 단순한 경기 침체를 넘어 산업 생태계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양상이다.

이는 비단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조업 비중이 높은 한국 경제에도 공급망 재편과 수출 전략 수정이라는 묵직한 과제를 던지고 있다.

블룸버그(Bloomberg)가 29일(현지시각)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프랑스 내 가동을 멈춘 공장은 총 160곳에 달했다. 이는 전년(121곳) 대비 32.2% 급증한 수치다. 반면 신규 설립 공장은 103곳에 그치며 전년(115곳)보다 10.4% 감소했다.

지표상으로만 보면 프랑스 영토에서 매주 3곳 이상의 공장이 사라지는 ‘산업 엑소더스’가 현실화한 셈이다.

전통 산업의 셧다운 공포… 철강·자동차 부품 ‘도미노 붕괴’


프랑스 제조업의 위기는 기간산업의 중추인 철강과 자동차 분야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세계 최대 철강사인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 SA)은 유럽 내 수요 절벽을 견디지 못하고 프랑스 북부 7개 사업장에서 600명 규모의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자동차 부품업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글로벌 부품사 발레오(Valeo SE)는 중국산 저가 부품의 파상공세와 전기차 전환 지연에 따른 가동률 저하로 공장 2곳의 폐쇄를 결정했다.

화학 대기업 아르케마(Arkema) 역시 치솟는 에너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수익성이 낮은 공정을 정리하며 인적 쇄신과 조직 슬림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 자동차 부품사 관계자는 "프랑스발 부품 공급망 차질이 장기화할 경우 유럽 현지 생산 라인에도 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프랑스 2030’과 EU의 공동 대응… 보조금으로 맞불 놓는 유럽

전통 제조업의 붕괴를 막기 위해 프랑스 정부와 유럽연합(EU)은 전방위적인 대응책을 가동 중이다. 마크롱 정부는 540억 유로(약 93조 원) 규모의 ‘프랑스 2030’ 계획을 통해 반도체와 전기차 등 미래 산업 공급망을 국내에 구축하고, 친환경 기술을 도입하는 기업에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주는 ‘녹색 산업 세액 공제’를 시행하고 있다.

EU 차원에서도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맞서 보조금 규제를 일시적으로 완화하고,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통해 아시아산 저가 제품에 탄소 가격을 부과하는 등 보호막을 강화하고 있다.

핵심원자재법(CRMA)을 통해 역외 의존도를 낮추려는 시도 역시 프랑스 내 제조 시설의 이탈을 방지하고 산업 주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풀이된다.

탄소 장벽에 갇힌 수출길… 한국산 철강·부품 직격탄 우려


현지 언론인 레제코(Les Echos) 등 외신은 이번 사태가 단순한 공장 폐쇄를 넘어 ‘공급망 안보’의 패러다임 변화를 의미한다고 분석한다. 특히 EU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강화하고 무관세 쿼터를 축소함에 따라, 한국산 철강재는 향후 초과 물량에 대해 50% 수준의 고율 관세를 부담해야 할 처지다.

화학 및 소재 분야도 상황은 비슷하다. 프랑스 내 건설 및 소비재 공장의 잇따른 폐쇄는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주요 수요처 상실을 의미한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유럽의 제조 기반 붕괴는 한국 중간재 수출의 하방 압력으로 작용한다”며, “단순 제품 수출을 넘어 현지 생산 거점을 확보하거나 탄소 중립 기술력을 강화하는 등 수출 전략의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산업 양극화 심화… 대형 공장 위주의 ‘착시 효과’ 경계해야


전문가들은 공장 숫자의 단순 비교가 실제 산업 현장의 타격을 완전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 조사는 공장의 규모나 가치를 따지지 않고 한 곳을 한 단위로 집계하기 때문이다.

현지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첨단 기술을 보유한 거대 공장(Gigafactory) 한 곳의 설립과 영세한 스타트업 공장 한 곳의 폐쇄를 동일한 비중으로 볼 수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하던 전통 제조업 공장들이 사라지는 속도가 신규 첨단 공장의 유입 속도보다 빨라 고용 시장의 수급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프랑스 정부는 제조업 부흥을 위해 다양한 지원책을 고심하고 있지만, 글로벌 무역 전쟁과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파고를 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프랑스의 사례는 첨단 산업 육성만큼이나 전통 제조업의 연착륙과 에너지 비용 안정화가 국가 경쟁력 유지에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방증한다.

우리 정부와 기업 역시 유럽 시장의 규제 변화를 면밀히 모니터링하며, 현지 맞춤형 공급망 전략을 재구축해야 할 시점이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