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시장의 이러한 거친 반발은 단순한 일시적 수급 불안이 아니다. 제17대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으로 취임한 케빈 워시(Kevin Warsh) 체제의 통화정책 행보를 향해 시장이 날리는 가장 직설적이고 차가운 불신임 투표다. 월가와 학계에서는 취임 이후 워시 의장이 보여주고 있는 스탠스를 두고 극심한 기시감을 드러내고 있다. 1970년대 백악관의 정치적 압력에 굴복해 인플레이션을 방관하다가 미국 경제를 파멸적인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의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최악의 연준 의장, 아서 번즈(Arthur Burns)의 망령이 반세기 만에 케빈 워시라는 인물을 통해 부활하고 있다는 준엄한 경고다. 유대계 엘리트 혈통부터 백악관 핵심 참모 출신이라는 정치적 궤적, 그리고 권력의 눈치를 살피며 인플레이션과의 정면 승부를 회피하려는 정책적 기조에 이르기까지, 케빈 워시 의장의 행보는 놀라울 정도로 아서 번즈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아서 번즈와 케빈 워시는 출발선부터 기묘할 정도로 닮아 있다. 190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아서 번즈는 컬럼비아대를 거치며 계량경제학과 경기순환론의 대가로 올라섰다. 그의 진정한 힘은 학문이 아닌 정치권력과의 유착에서 나왔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백악관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내며 워싱턴의 권력 생리를 익힌 그는, 리처드 닉슨의 대선 캠프 경제참모를 거쳐 1970년 연준 의장 자리를 꿰찼다. 그는 중앙은행 총수이기 이전에 뼛속까지 '백악관의 대변인'이었다.
케빈 워시 의장의 이력 역시 번즈의 데칼코마니다. 유대계 가문 출신으로 스탠퍼드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모건스탠리에서 인수합병(M&A) 전문가로 경력을 쌓은 그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대통령 경제정책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되었다. 2006년 만 35세의 최연소 나이로 연준 이사회에 입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 또한 순수 경제학적 연구 성과가 아닌 백악관과의 두터운 정치적 유대와 정무 감각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상아탑의 원칙에 갇힌 학자형 관료가 아니라, 선거 공학과 권력의 셈법을 누구보다 꿰뚫어 보는 ‘정무형 경제 테크노크라트’였다.
번즈는 물가가 뛰면 마지못해 금리를 올렸다가도, 경기 침체 우려나 정치권의 비난이 쏟아지면 곧바로 금리를 내리는 유약한 ‘스톱 앤드 고(Stop-and-Go)’ 정책을 남발했다. 중앙은행이 물가를 잡을 의지가 없음을 간파한 시장에서는 기대인플레이션이 폭발했고, 화폐가치 폭락에 직면한 채권 투자자들은 장기 국채를 집단 투매했다. 그 결과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연 8%, 9%를 넘어 폭등했다. 그 결과 미국 경제는 10년 넘게 고물가와 경기 침체가 공존하는 파멸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 빠졌다. 새 연준 의장에 오른 케빈 워시가 취임후 보여준 행보는 놀랍게도 아서 번즈와 꼭 닮았다. 워시 의장은 인플레가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AI 혁신에 따른 공급 능력 확충이 물가를 안정시킬 것"이라는 장밋빛 논리를 내세우며 백악관의 금리 인하 및 유동성 요구에 영합하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물가지표를 개편하겠다는 구상까지 내놓고 있다. 이는 1970년대 아서 번즈가 오일쇼크를 일시적 외생 변수로 치부하며 완화 정책의 핑계를 찾았던 '인플레이션 현실 도피'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두 사람의 궤적과 메커니즘을 비교하면 소름 돋을 정도로 동일한 파국의 경로가 확인된다.유대계 엘리트 혈통에 명문 학부를 거쳐 백악관 핵심 참모로 권력의 중심에 섰다는 배경부터 일치한다. 번즈가 닉슨의 대선 참모를 거쳐 연준 의장에 오른 뒤 행정부의 재선 압력에 굴복했듯이, 워시 의장 역시 백악관 특별보좌관 출신으로서 트럼프 행정부와의 깊은 정치적 유대 속에서 금리 인하와 유동성 확대라는 정치적 요구에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물가에 대응하는 방식 역시 판박이다. 번즈가 유가 급등을 일시적 요인으로 둘러대며 금리 인하를 서두르는 '스톱 앤드 고'로 일관하다 인플레이션을 방관했듯, 워시 의장 또한 물가 압력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백악관의 피벗(통화정책 전환) 압력을 수용하는 치명적 과오를 범했다.그 결과 시장이 내린 심판 역시 완벽히 동일하다. 번즈의 유약함이 기대인플레이션 폭발과 국채금리 폭등,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듯이, 워시 의장의 타협적 행보에 직면한 시장은 장기 국채를 대거 내던지며 강력한 반격에 나섰다. 월가의 전설적인 이코노미스트 에드 야데니가 명명한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채권 자경단은 연준이 '베어 스티프닝(Bear Steepening)'을 유발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중앙은행 총수가 백악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금리를 낮추려 한 대가는 모기지 금리와 기업 대출금리의 폭등이라는 실물경제의 치명상으로 되돌아왔다. 단기 금리를 억눌러 경기를 띄우려다 장기 금리가 천장을 뚫고 치솟으면서, 오히려 실물경제가 극심한 신용 긴축과 스태그플레이션의 위협에 직면하는 역설적 파국이 벌어지고 있다.아서 번즈와 케빈 워시 모두 같은 유대계 엘리트이자 백악관의 내부자 출신이라는 공통점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 권력의 유혹과 중앙은행의 헌법적 책무 사이에서 통화정책 책임자가 겪어야 할 가장 위험한 시험대를 상징한다. 번즈는 닉슨의 눈치를 보며 인플레이션을 방관한 대가로 미국 경제를 10년의 암흑기로 몰아넣고 연준 역사상 최악의 의장이라는 낙인을 얻었다. 케빈 워시 의장이 지금과 같이 백악관의 정치적 압력에 영합하며 물가 안정을 뒷전으로 미룬다면, 그 역시 ‘제2의 아서 번즈’라는 역사적 오명을 피할 수 없다.지금 국채금리의 폭등은 워시 의장의 위험한 도박을 향해 시장이 보내는 엄중한 최후통첩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