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서울 ‘다온 갤러리’와 천안 '갤러리아 장' 두 곳에서 펼쳐지는 이번 전시는 바쁜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비움’과 ‘생명력’, ‘시간의 깊이’를 되새기게 하는 고요한 울림의 자리가 된다. 장혜림 화백은 홍익대 미술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후, 뉴욕 주립대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회화를 전공하며 동서양의 예술 언어를 깊이 있게 탐구해 왔다. 이후 미국 프린스턴 아트 아카데미(Princeton Art Academy, NJ) 과정을 수료하였다.
대한민국 문인 산수화 협회 이사 및 심사위원, 코리안 서포터즈 미술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 세계 무대에서 50회 이상의 단체전 및 초대전에 참여하며 견고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중진 작가이다. 장혜림 작가의 작품은 동양적 미의식과 현대적 조형 감각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어, 세계 각국의 주요 기관과 개인 컬렉터들에게 그 가치를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녀의 미학적 특성을 이루고 있는 몇몇 인상을 살펴본다.
자연으로의 여정은 여백과 색채가 만드는 서정적 공간에서 출발한다. 화면 아래쪽의 짙은 황토색 대지와 위쪽의 푸른 회색 하늘·바다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그 사이에 두 마리 사슴과 멀리 떠 있는 섬, 등대는 광활한 공간에 서정적 긴장감을 부여한다. 넓은 무채색 공간은 빈 배경이 아니라 고요와 거리감, 생명의 존재를 드러내는 조형 요소다.
생명력의 색채와 유기적 구성이다. 녹음이 짙은 숲과 계곡을 담은 작품은 황록색과 진녹색의 차이를 활용해 식생의 층위와 빛의 변화를 표현한다. 좌우의 나무와 중앙의 물길은 시선을 화면 안쪽으로 이끌며, 아래쪽의 사슴은 풍경에 구체적인 생명의 서사를 더한다. 자연의 풍부한 색채를 활용하면서도 물길과 안개를 통해 시각적 호흡을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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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자연과 인간의 삶이 만난다. 산자락 아래 마을과 논밭, 굽이치는 길, 꽃나무가 어우러진 작품은 자연을 인간의 삶과 분리하지 않는다. 산의 묵직한 회색 조와 봄꽃의 노란색·분홍색이 대조하고, 지붕과 길은 풍경에 생활의 흔적을 더한다. 자연의 장엄함과 일상의 평온함을 한 화면에 담아 작가는 풍경화에 공동체적 기억과 정서적 친근함을 표현한다.
겨울 풍경에서 흰 눈과 회청색 산세, 검은 나뭇가지가 제한된 색채 안에서 강한 조형적 긴장을 형성한다. 사슴의 갈색 형상은 차가운 화면에 따뜻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며, 발자국은 정지된 설경 속에 이동과 시간의 흐름을 새겨 넣는다. 눈의 흰색을 적극적으로 남겨 두는 방식은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리는 한국화적 여백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작품에서 읽히는 작가의 심성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극적인 대상으로 과장하기보다 그 안에 머물며 생명의 질서를 관찰하는 태도에 가깝다. 사슴은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새들은 거대한 산과 물을 배경으로 서로 마주하거나 쉬고 있다. 이 동물들은 장식적 소재라기보다 자연의 평온함과 생명의 연속성을 환기하는 정서적 매개체다.
사슴을 홀로 두기보다 두 마리 또는 무리로 배치하는 것은 공존과 동행의 의미를 담는다. 이를 작가의 실제 성격이나 내면에 대한 확정적 진술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화면이 관람자에게 전달하는 정서적 효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작품의 온화한 분위기는 자연을 향한 애정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조형적으로 구현된 결과이다.
장혜림 화백의 심미안은 자연의 모든 세부를 동일한 비중으로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작가는 풍경의 핵심적인 인상을 선별하고, 산의 윤곽과 숲의 밀도, 물의 흐름, 동물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가까운 대상은 붓질의 질감과 색채의 밀도로 표현하고, 먼 산과 섬은 옅은 농담으로 처리하여 공간의 깊이를 만든다.
독창성은 무엇보다 광대한 자연과 작은 생명체 사이의 규모 차이를 시적 긴장으로 전환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사슴을 화면의 가장자리나 넓은 설원 한쪽에 배치한 작품에서는 주변의 빈 공간이 동물의 존재를 오히려 강조한다. 이는 자연의 웅장함을 압도적인 묘사로 표현하기보다 생명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드러내는 접근이다.
사슴과 새, 숲과 계곡이라는 소재 자체는 동양 산수화와 현대 풍경화에서 폭넓게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작가의 독자성을 더욱 엄밀하게 평가하려면 소재의 선택을 넘어, 붓질의 고유한 리듬과 화면 구성의 변별성, 반복되는 모티프가 작품마다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장혜림 작가의 작품 구성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우선 수평적 안정감이다. 바다와 대지, 설원과 숲의 경계가 수평적으로 놓이면서 화면에 안정된 구조를 형성한다. 황토색 대지는 화면의 무게중심을 낮추고, 위쪽의 넓은 공간은 시선을 멀리 확장한다. 그다음 전경·중경·원경의 분리이다. 가까운 나무와 동물, 중간의 물과 섬, 먼 산의 층위를 구분해 공간감을 확보한다. 농담과 색채의 차이는 거리감을 만들어 내는 핵심적인 수단이다.
마지막으로 작은 형상을 강조한다. 사슴과 새는 화면의 크기에 비해 작게 그려지지만, 주변의 여백과 색채 대비 덕분에 시선의 초점이 된다. 작은 형상은 풍경의 일부이면서 전체 화면의 정서적 중심이다. 설경에서 여백의 활용이 두드러진다. 눈 덮인 공간을 남겨 둠으로써 적막과 고요가 핀다. 여백이 반복적인 공식에 머물면 작품 사이의 구성적 차이가 약해질 수 있다. 앞으로는 시점과 화면의 비례, 형상의 배치에 더 다양한 변화를 주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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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장혜림 작가 작품들의 자연 친화성은 아름다운 풍경을 그렸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슴이 숲과 설원에서 움직이고, 새가 물가의 가지에 머물며, 마을이 산과 계곡에 기대어 자리 잡는 모습은 자연과 생명, 인간의 생활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자연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여러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제시된다.
계절의 변화도 중요한 의미를 소지한다. 봄의 연둣빛과 노란 꽃, 여름의 짙은 녹음, 겨울의 흰 눈은 자연을 순환하는 생명의 체계로 드러낸다. 설경 속 사슴의 발자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동의 시간까지 화면 안에 끌어들인다. 자연의 표면과 그 아래 흐르는 시간을 동시에 주목함으로써 작품은 서정성 너머의 생태적 감수성을 환기한다.
장혜림 작가는 전통과 현대를 대립시키지 않는다. 한국화는 수묵화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채색과 재료의 변화를 통해서도 발전해 왔다. 색채의 풍부함이 한국화의 전통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녀의 작품은 전통 산수화의 여백과 농담,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계승하면서도, 동물의 사실적 형상과 계절별 색채 대비로 친근한 풍경의 정서를 구축한다.
기교 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농담의 조절, 붓질의 속도감, 색 면의 중첩, 그리고 세부 묘사와 생략의 균형이다. 산의 표면은 여러 번 겹친 붓질로 굴곡과 밀도를 드러내고, 숲은 크고 작은 붓 자국을 축적해 식생의 복합적인 질감을 만든다. 반면 사슴과 새는 비교적 간결한 윤곽으로 표현해 주변 풍경과 구별되는 시각적 초점을 형성한다.
설경은 흰 바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검은 나무와 푸른 회색의 그림자를 배치해 공간의 깊이를 확보한다. 눈발 연의 점묘적 표현은 화면에 운동감을 더하고, 동물의 발자국은 정지된 풍경에 시간의 흐름을 부여한다. 녹음이 우거진 작품에서 색채와 붓질의 밀도를 높이고, 바다와 설원의 작품에서는 표현을 절제, 자연의 상이한 성질을 구분한다.
기교의 숙련도와 미학적 성취는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붓질이 능숙하고 풍경의 재현이 안정적이더라도, 그 표현이 작가만의 필연적인 조형 언어로 발전했는지는 별도로 살펴야 한다. 향후 작품에서 붓질의 리듬과 여백의 비례, 동물의 위치가 더 과감하게 변주된다면 표현의 폭과 개성은 한층 넓어질 수 있다.
장혜림의 작품 세계는 자연을 관찰하는 시선과 생명에 대한 애정, 여백을 활용하는 절제된 구성, 계절의 변화를 담아내는 색채 감각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사슴과 새라는 작은 존재를 광대한 자연 속에 배치하여 생명의 소중함과 공존의 정서를 환기하는 점은 이번에 제시된 작품들을 관통하는 특징이다. 자연의 세부를 과시하기보다 필요한 형상만 남기고, 색채의 대비와 농담의 차이로 공간의 깊이를 확보하는 방식은 작가의 서정적 심미안을 드러낸다.
제19회 장혜림 개인전은 반복되는 사슴과 숲, 설경이 새로운 조형적 의미를 창출하는지, 자연미의 재현을 넘어 생태적 위기와 인간·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사유하게 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남긴다. 작가의 과제는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각과 조형적 필연성을 강화하여, 여백과 색채, 생명의 형상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독자적인 현대 한국화의 언어를 확립하는 데 있다. 여러 제약을 감수한 한국에서의 전시가 성공하길 기원한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사진=장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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