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만마르크만 있어도 노후가 보장되던 시절이 바로 10년 전인데 지금 버터 1kg을 사려면 50억마르크가 필요하다면 믿겨지는가?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인 1923년 독일 전역 저자거리는 가방에 가득 담은 지폐 다발을 얼마 안 되는 식량과 바꾸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경제학의 역사는 이 광란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주의깊게 바라본다. 아직도 많은 학자들이 그 원인에 대해 소위 ‘論하고 爭하고’ 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같은 이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나 나치의 출현이 이미 독일 대중을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던, '국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끔찍한 인플레이션은 독일 전역을 덮쳤다. 경제가 파탄 나고 사회 발전 방향을 둘러싸고 정치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독버섯처럼 히틀러의 나치즘이 사회에 파고들었다. 지식인들이 인종차별과 폭력에 호소하는 히틀러가 독일에 끔찍한 고통을 몰고 올 것임을 수차에 걸쳐서 경고했지만 현실의 삶에 지친 국민들은 그들의 경고를 듣는 것 대신 이 독재자가 내민 손을 덥썩 잡아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집권에 성공한 히틀러는 유태인을 주적으로 명시하고 강한 독일의 재건과 애국심을 전면에 내세운채 패전과 경제 파탄으로 국민적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독일인들을 자극했다. 세계 2차대전이 그렇게 시작됐다.

다시 과거로 가보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국과 패전국인 독일은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모여 평화조약을 맺는다. 말이 평화조약이지 사실은 모든 전쟁이 그랬듯 승전국의 패전국 압박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조약에 따라 이른바 베르사유 체제를 구축해 독일을 억눌렀다. 15편 440개조로 구성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이 차지한 알사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돌려주고 벨기에와 폴란드에게 독일 영토 일부를 떼어주며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하고 독일이 점령한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독일의 육군과 해군 병력 제한, 징병제 철폐, 라인란트 지역의 15년간 연합국 점령 등 다양한 요구가 포함돼 있었다. 게다가 패전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했던 이 조약의 231조에는 독일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뭉개버리는 늑약(勒約) 조항이 있었다. 1차대전 책임이 전적으로 독일에 있으므로 전승국, 특히 주된 전장이 됐던 프랑스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이 배상금 지불 조항이 나중에 독일에 사상 초유의 대형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2년이 지난 1921년5월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는 런던 주재 독일 대사를 조용히 불러 '런던 최후통첩'이라는 문서를 전달한다. ‘독일은 배상금으로 매년 20억마르크씩 합계 1320억마르크를 연합국 측에 배상하고 연간 수출액 중 26%를 연합국에 지불하되 약정 기한 안에 지불하지 못하면 그 제재 조치로 공업지대 루르를 군사적으로 점령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당시 독일 정부는 영국이 제시한 최후통첩 수락을 거부하고 내각 총사퇴 등의 소동을 벌였으나 결국 아무 힘도 없고 보복을 막아낼 최소한의 군사력도 없는 상황에서 연합국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새로 구성된 독일정부는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2개월 뒤 문서에 적힌 대로 우선 10억마르크를 지불했다. 전쟁 배상금은 46년간, 혹은 그 이상 나눠낼 수 있다고 하지만 독일의 2년 GNP(국민총생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미 망해버린 1차대전 직후 독일의 경제 실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연합국이 이같은 무리한 요구를 내건 데는 연합국 측 특히 프랑스가 독일의 재군비와 부국강병을 원천봉쇄하고자 했던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빈다고 했던가? 1차대전 패전 직후 수립된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은 연합국의 점령 위협 속에서 감당 못할 전쟁 배상을 강요받아 극심한 경제난에 빠졌다. 독일이 제때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자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1923∼1924년 독일 루르 공업지대를 실제 점령하는 일도 있었다. 문제는 이 배상금을 치르기 위해 독일 정부가 중앙은행 발행 화폐량을 크게 늘리고 국채를 외국에 헐값에 팔면서 촉발된다. 독일 마르크는 이내 런던과 파리, 뉴욕 등 연합국 각국에 넘쳐났고 가치가 폭락했다. 1차대전 직전 1달러의 가치는 4.2마르크였지만 1921년11월 1달러는 276마르크를 줘야 살 수 있었다. 7년 전 시세의 70분의 1로 떨어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