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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배상금에 짓눌린 자존심, 독재자의 손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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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배상금에 짓눌린 자존심, 독재자의 손을 잡다

[왁자지껄 경제학]⑪ 히틀러와 하이퍼인플레이션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휴지조각이돼버린마르크화지폐덩어리를가지고노는아이들.인플레이션은공포그자체다.
▲휴지조각이돼버린마르크화지폐덩어리를가지고노는아이들.인플레이션은공포그자체다.


6만마르크만 있어도 노후가 보장되던 시절이 바로 10년 전인데 지금 버터 1kg을 사려면 50억마르크가 필요하다면 믿겨지는가?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인 1923년 독일 전역 저자거리는 가방에 가득 담은 지폐 다발을 얼마 안 되는 식량과 바꾸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경제학의 역사는 이 광란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주의깊게 바라본다. 아직도 많은 학자들이 그 원인에 대해 소위 ‘論하고 爭하고’ 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같은 이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나 나치의 출현이 이미 독일 대중을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던, '국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끔찍한 인플레이션은 독일 전역을 덮쳤다. 경제가 파탄 나고 사회 발전 방향을 둘러싸고 정치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독버섯처럼 히틀러의 나치즘이 사회에 파고들었다. 지식인들이 인종차별과 폭력에 호소하는 히틀러가 독일에 끔찍한 고통을 몰고 올 것임을 수차에 걸쳐서 경고했지만 현실의 삶에 지친 국민들은 그들의 경고를 듣는 것 대신 이 독재자가 내민 손을 덥썩 잡아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집권에 성공한 히틀러는 유태인을 주적으로 명시하고 강한 독일의 재건과 애국심을 전면에 내세운채 패전과 경제 파탄으로 국민적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독일인들을 자극했다. 세계 2차대전이 그렇게 시작됐다.


다시 과거로 가보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국과 패전국인 독일은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모여 평화조약을 맺는다. 말이 평화조약이지 사실은 모든 전쟁이 그랬듯 승전국의 패전국 압박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조약에 따라 이른바 베르사유 체제를 구축해 독일을 억눌렀다. 15편 440개조로 구성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이 차지한 알사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돌려주고 벨기에와 폴란드에게 독일 영토 일부를 떼어주며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하고 독일이 점령한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독일의 육군과 해군 병력 제한, 징병제 철폐, 라인란트 지역의 15년간 연합국 점령 등 다양한 요구가 포함돼 있었다. 게다가 패전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했던 이 조약의 231조에는 독일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뭉개버리는 늑약(勒約) 조항이 있었다. 1차대전 책임이 전적으로 독일에 있으므로 전승국, 특히 주된 전장이 됐던 프랑스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이 배상금 지불 조항이 나중에 독일에 사상 초유의 대형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2년이 지난 1921년5월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는 런던 주재 독일 대사를 조용히 불러 '런던 최후통첩'이라는 문서를 전달한다. ‘독일은 배상금으로 매년 20억마르크씩 합계 1320억마르크를 연합국 측에 배상하고 연간 수출액 중 26%를 연합국에 지불하되 약정 기한 안에 지불하지 못하면 그 제재 조치로 공업지대 루르를 군사적으로 점령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당시 독일 정부는 영국이 제시한 최후통첩 수락을 거부하고 내각 총사퇴 등의 소동을 벌였으나 결국 아무 힘도 없고 보복을 막아낼 최소한의 군사력도 없는 상황에서 연합국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새로 구성된 독일정부는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2개월 뒤 문서에 적힌 대로 우선 10억마르크를 지불했다. 전쟁 배상금은 46년간, 혹은 그 이상 나눠낼 수 있다고 하지만 독일의 2년 GNP(국민총생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미 망해버린 1차대전 직후 독일의 경제 실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연합국이 이같은 무리한 요구를 내건 데는 연합국 측 특히 프랑스가 독일의 재군비와 부국강병을 원천봉쇄하고자 했던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빈다고 했던가? 1차대전 패전 직후 수립된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은 연합국의 점령 위협 속에서 감당 못할 전쟁 배상을 강요받아 극심한 경제난에 빠졌다. 독일이 제때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자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1923∼1924년 독일 루르 공업지대를 실제 점령하는 일도 있었다. 문제는 이 배상금을 치르기 위해 독일 정부가 중앙은행 발행 화폐량을 크게 늘리고 국채를 외국에 헐값에 팔면서 촉발된다. 독일 마르크는 이내 런던과 파리, 뉴욕 등 연합국 각국에 넘쳐났고 가치가 폭락했다. 1차대전 직전 1달러의 가치는 4.2마르크였지만 1921년11월 1달러는 276마르크를 줘야 살 수 있었다. 7년 전 시세의 70분의 1로 떨어진 것이다.
▲버려진마르크화를누군가가빗자루로쓸고있다.
▲버려진마르크화를누군가가빗자루로쓸고있다.
반면 물가는 같은 시기에 2400%나 올랐다. 1922년7월부터 마르크는 화폐의 기능을 잃게 됐다. 그해 7월 달러당 300마르크였던 독일 통화의 가치가 연말에는 8000마르크까지 폭락했다. 이 정도라면 흔히 말하는 인플레이션이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상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독일 국민들은 휴지조각 수준의 마르크를 타국 화폐나 일반 물건으로 바꾸려 했다. 독일 정부가 국민의 외화 소유를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기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마르크화 가치가 폭락하고 독일 국민이 공황 상태에 빠지자 그렇지 않아도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독일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1923년7월 독일 국내 물가는 1년 전보다 7500배가 뛰었고 2개월 뒤 24만 배, 그 3개월 후에는 75억배로 뛰었다. 독일 화폐 제조창이 인쇄해 시중에 유통시킨 마르크화는 1923년1월 1조마르크를 넘어섰다. 환율이 달러당 4조2000억 마르크가 되었다. 초대형 인플레이션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빵 1킬로그램 값이 4280억마르크였다. 버터 1킬로그램은 50억마르크에 거래됐다. 1913년만 해도 6만마르크만 있으면 정년 뒤 안락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1923년에는 같은 돈으로 신문 한 장도 살 수 없었다. 초인플레이션 기간 독일 국민들은 생존을 위해 집 안의 모든 물건을 들고 나가 어떻게든 식량과 바꾸려 했다. 의사는 치료비 대신 식량을 원했고 대학생 절반 이상이 수업료를 내려고 농장이나 공장에 나가 일했다. 실업률이 30%를 넘고 고기나 우유 소비량이 80%나 줄어 영양실조에 따른 결핵환자와 사망자가 급증했다. 배상금 지불은커녕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자 연합국 측은 미국 주도로 배상 요구를 완화했다. 루르 지방을 점령했던 프랑스군도 철수했다. 독일의 인플레이션도 수습되는 조짐을 보인다. 하지만 이미 몇 해동안 계속된 초인플레이션과 경제공황, 연합국의 압박은 독일 국민의 민족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일부는 인플레이션을 틈타 재산을 불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과거 힘겹게 모은 부를 한순간에 잃어버렸다. 이같은 위기의 순간에 등장하는 것이 ‘독일판 정도령’ 아돌프 히틀러다. 독일 곳곳에서 연설을 통해 독일의 재기를 부르짖는 국가주의자들의 아지프로(선전 선동)가 빛을 발한다. 이들의 선동적 구호에 대중들이 귀 기울이면서 인류의 비극은 다시 시작된다.
▲히틀러집권직후독일뉘른베르크에서열린나치당전당대회
▲히틀러집권직후독일뉘른베르크에서열린나치당전당대회
1924년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선거. 기존 정치 세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고 공산주의 정당과 국가주의 정당이 약진한다. 이들 정당 중 하나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NSDAP), 즉 ‘나치스’(Nazis)다. 히틀러는 독일의 부흥을 외치며 패전 후 연합국의 군사, 외교, 경제적 압박에 짓눌려 있던 독일 국민의 열등감과 반감을 자극했다. 히틀러와 나치스는 빠른 속도로 세력을 키워 8년 뒤에는 의회 제1당이 된다.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을 대신하는 3제국이 수립되고 히틀러가 총통으로 취임해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하켄크로이츠라고불리는독일나치당의상징깃발
▲하켄크로이츠라고불리는독일나치당의상징깃발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결속시켜 공업 생산력을 확충하고 재군비를 진행하는 한편 오스트리아 등 인근 영토를 늘리고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언한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평화조약이 독일에 민족적 굴욕을 강요하고 초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켜 독일 경제를 황폐하게 만든 원흉이라며 국민을 선동했다. 연합국의 전쟁 배상 요구마저 뿌리친 히틀러는 마침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해 독일과 세계를 다시 전쟁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다. 연합국의 1차대전 배상 요구로 궁지에 몰린 독일이 히틀러를 내세워 도로 연합국에 맞선 것이다. 하지만 독일 국민은 정신병자 히틀러를 수장으로 다시 한번 패전을 자청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프랑스, 영국 등 연합국은 이미 기력을 잃은 적을 너무 궁지로 몰아넣었다가 다시 한번 그 적과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됐다. 산업/IT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