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란의 소요 속에 군인들은 제거해야 할 관료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칠문'을 하게 되었다. 칠문은 본래 백성의 원성을 사거나 부패를 일삼는 탐관오리를 적발하여 사헌부에서 '야다시(夜茶時)'를 열어 죄를 논한 후에 해당 관료의 집에 찾아가 물증을 들이대어 인정하게 하고 죄목을 흰 널판에 써서 대문 위에 붙인 연 후 그 대문에 옻칠(漆門)을 한 다음 가시덤불로 막아 출입을 봉쇄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칠문을 결정하는 야다시 회의는 말뜻 그대로 사헌부 관리들이 야간에 비상 소집되어 은밀히 논의하는 것은 물론이고 혹여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하여 차를 마시면서 신중을 기하는 회의였는데 임오군란 때는 야다시를 무시하고 폭동 군인들이 칠문만 행했던 것이다.
여하튼 군란 당시 군인들에 의해 칠문 당한 집을 보면서 오가는 사람들은 "내 저리 될 줄 알았지. 이제 저 집 야단났군!"하면서 혀를 차곤 했다. 그런데 칠문당한 집에 대고 '야단났다'고 했는데, 여기서 '야단'은 칠문을 결정하는 '야다시' 회의의 '야다'에서 나온 말로, "야단났다"는 곧 "칠문 당했다"와 같은 의미이고, 오늘날에는 와서는 '매우 곤란한 일을 당할 때' 사용되고 있다.
설법도 듣고 볼거리도 즐기려니 당연히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이러한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모습에서 '야단법석'이 크게 변형된 의미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의 야단법석이 다소 부정적으로 쓰이고, '야단치다' 혹은 '야단맞다'도 같은 맥락으로 스님이 설법하는데 시끄럽게 떠들면 호통을 쳐서 장내를 조용하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 하는데 조금은 혼란스럽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