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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비우셨습니까"…절은 '소원 비는 곳'이자 '쌓인 번뇌 비우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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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비우셨습니까"…절은 '소원 비는 곳'이자 '쌓인 번뇌 비우는 곳'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절에 가는 마음
사찰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조용하게 울려퍼지는 풍경 소리는 속세에 쌓인 번뇌를 잊게 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사찰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조용하게 울려퍼지는 풍경 소리는 속세에 쌓인 번뇌를 잊게 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매년 수능이 다가오면 절집 스님은 바쁩니다. 시험 잘 치르게 해달라는 발길들 때문이지요. 한 동안 뒤치다꺼리하는 스님이야 그렇다 치지만, 큰 집에 앉아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님과 보살님들도 분주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중생을 모두 구제한다는 관음보살님 앞은 장사진의 긴 꼬리가 남다릅니다. 불자는 합장한 바람이 다 이뤄질 거라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석양빛을 받으며 산문을 나설 때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답니다.

절은 뭔가를 바라며 ‘비는 곳’이기도 하지만, 마음속 해묵은 번뇌를 ‘비우는 곳’이기도 합니다. 비워야 극락에 갈 수 있고 깨달음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락을 생각하고 다만 얼마라도 비워지길 기대하며 절에 가는 것입니다. 물론 꼭 절에 가야만 비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절은 분위기도 그렇고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속세에서보다 한결 수월합니다. 오늘은 비록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풍광 좋아 가끔 들르는 ‘비움의 절’을 스케치 해 볼까합니다.

절의 공간을 다른 말로 ‘가람’이라 합니다. 가람은 불자들이 꿈꾸는 이상의 세계 ‘불국토’를 현세의 땅에 상징적으로 형상화 한 것입니다. 불국토의 본래 모습은, 부처님이 계시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9개의 산과 8개의 바다가 감싸고, 가장자리 동서남북에 중생의 땅-속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속세는 각각 동승신주·서우화주·남섬부주·북구로주인데, 이 중에서 한국인이 살고 있는 곳은 남섬부주라고 합니다. 따라서 수미산의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남섬부주를 떠나 험난한 9산8해를 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현실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스님은 절을 만들고 중생은 그곳을 찾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히는 경주 불국사 전경.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히는 경주 불국사 전경. 자료=글로벌이코노믹

속세를 벗어나 절로 향하다 보면, 가장 먼저 ‘해탈교’를 만나게 됩니다. 모든 절에 해탈교가 있는 것은 아니라니 참고하시면 되겠고, 아무튼 해탈교 밑으로는 반드시 물이 흐릅니다. 이는 불국토의 8개 바다를 암시하지요. 그래서 이 다리를 건너야 수미산 부처님의 영토에 들어가는 것처럼, 절의 영역에 첫발을 디디는 것이랍니다.

해탈교에서 내려다보는 물빛의 반짝거림은 마치 ‘속세의 때를 씻겨 보내고 깨끗해진 마음으로 건너가라’고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시킨 듯 눈을 감고 해묵은 상념을 다리 밑으로 던졌더니, 왠지 몸이 가뿐해지고 물·새·곤충 소리가 새롭게 청아합니다. 주변 풍경에 취해 느린 걸음을 옮기는데 불쑥 길쭉한 돌기둥이 시선을 막습니다. ‘당간 지주’입니다. 신성한 공간임을 일깨우고, 부처님이 가까이 있음을 알리는 표식입니다.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겠습니다.

절집 첫 번째 문은 일주문(一柱門)입니다. 불국토에서는 수미산의 첫 관문에 해당됩니다. 산문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절 이름의 편액을 걸고 사바세계와 경계를 가릅니다. 해탈교에 이어 두 번째 ‘비움’의 장소이기도 한데, 기둥에 적혀있는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 즉 「이 문에 들어오거든 안다는 것을 버려라」 라는 글자가 문 없는 일주문을 설명합니다. 속세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새 눈이 열린다는 간절한 당부이기도 하고요.

스님이 대웅전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스님이 대웅전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잠시 서서 두리번거리는데, 산바람이 등 떠 밀며 안내를 자청합니다. 300년 늙은 노송 넋두리도, 이름 모를 꽃과 풀들의 사연도 참 재밌게 해설합니다. 이야기에 빠지다보니 어느새 힘 안들이고 굽은 언덕길을 금세 올랐습니다.

문득 어디선가 “마음을 비웠느냐?”하는 목소리가 울립니다. 놀라 시선을 돌리자 산바람은 간데없고, ‘금강문’ 편액이 눈에 들어옵니다.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고 좌우를 보자, 입을 반쯤 벌리고 ‘아~’ 소리를 내는 「아금강역사」와 ‘옴’소리를 내며 입을 닫는 「옴금강역사」가 무시무시합니다. 불가에서 ‘아’는 시작이고, ‘옴’은 끝입니다. 이를 합친 ‘아옴’은, 「시작이 끝이고, 끝은 시작이니 본래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부처의 진리를 함축한 말입니다. 암튼 이 문을 통과하면 내 몸에 붙어 있을지도 모를 악귀가 제거된다니 감사의 합장을 하면서도 왠지 주눅이 들어 슬금슬금 문턱을 넘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강역사의 무서운 잔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게 섰거라” 하면서 거인 네 명이 눈을 부라리며 또 길을 막습니다. ‘천왕문’에 계신 이 분들은 본래 고대 인도의 신이었답니다. 부처님 가르침 덕에, 귀의하여 수미산 중턱에 머물고 있는데, 이승에서는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인도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은 칼, 서쪽 광목천왕(廣目天)은 탑, 남쪽 증장천왕(增長天)은 용, 북쪽 다문천왕(多聞天)은 비파(琵琶)를 뜯으며 죄지은 중생들을 발로 짓누르고 있습니다. 왜 각각의 것을 들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큰 몸짓에 지레 겁먹어 눈을 감고 바르게 살겠다고 합장하자, 비로소 통과하라 하십니다.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이젠 부처님을 볼 수 있겠지 하는데 또 문이 나타납니다. 낙심한 표정으로 잠시 발을 멈추자, 마지막 문이라고 지나가던 스님이 귀띔하네요. ‘불이문’ 수미산 정상 즉 부처님이 계신 집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문입니다. ‘불이不二’는 「둘이 아닌 하나」란 의미로 선악도 하나, 짐승과 사람도 하나, 세상 모든 것들은 본디 하나임을 깨우치게 하는 말입니다. 번뇌는 이것과 저것을 ‘가르는’ 것에서 생긴다합니다. 그러기에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편 가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이를 터득하는 자만이 해탈을 할 수 있다하여 불이문을 ‘해탈문’이라고도 합니다. ‘선과 악은 한 몸이다.’ 심오하면서 알 듯 모를 듯, 계면쩍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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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글로벌이코노믹

드디어 부처님 집 마당에 들어섭니다. 성급한 마음에 ‘대웅전’으로 쪼르륵 달리고 싶지만, 주변에 참견할 게 너무 많습니다. 무엇보다 2층 누각에 매달린 종·물고기·북·쇠판이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일명 불교의 소리라는 ‘범종각’입니다. ‘이승과 저승의 생명체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내려주십사’하며 중생 대표로 스님이 간구하는 곳입니다. 스님이 두드리는 울림 도구 네 가지를 사물(四物)이라 하는데, 이것들이 큰 소리를 냄으로써 부처님이 잘 들을 수 있다합니다. 북(법고)소리는 육지 모든 생명체의 간절함이며, 물고기(목어)는 물속의 중생을, 쇠판(운판)은 새나 곤충 등 날아다니는 중생을 구제해달라고 웁니다. 나머지 종(범종) 소리는 지옥에 떨어진 중생조차도 구제해 달라는 간곡한 읍소입니다. 사물마다 이런 깊음이 있다니 마음이 짠해집니다. 그러나 누각아래 펼쳐진 황홀한 풍광을 보는 순간 언제 그랬나싶게 기분이 들뜨고 맙니다. 철없는 중생, 맞는 거 같습니다.

누각을 내려오니 탑 주변을 돌며 합장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호기심이 또 동합니다. ‘탑’은 석가모니의 무덤을 상징하는 것이라네요. 석가모니께서 열반(번뇌가 사라진 세계)에 오를 때 많은 ‘사리’를 남기셨는데, 여러 사찰이 이를 가져다 안치하고 그 위에 돌탑을 쌓은 것이랍니다. 부득이 사리를 못 모신 절은 ‘불경(부처님 말씀)’으로 대신하고 탑을 세웠다니, 탑은 곧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그리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불자가 아닌 나도 따라서 합장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근데 저것도 탑인지요?” 팔각형 돌 지붕을 쓰고 밑 4면에 창을 낸 흡사 탑같이 생겼습니다. “석등이에요” 그것도 모르냐는 눈칩니다. 불가에서 등불을 밝히는 것은 공양(공경하는 마음으로 음식·옷·꽃·향 등을 올리는 의식) 중에서도 으뜸이랍니다. 석등에 불을 밝히면, 진리가 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춘답니다. 알면 보인다고 듣고 나니 또 다시 눈길이 갑니다.

석등을 뒤로 하고 마침내 부처님 전각 계단을 오릅니다. 「대웅전(大雄殿)」 큰 영웅이 계신 곳. 영웅은 당연히 석가모니 부처님이십니다. 금불상 모습으로 상단 중앙에 앉아, 해탈의 진리를 말없이 설파 중이십니다. 그런데 손동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오른 손끝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를 향한 채 하복부에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악귀의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랍니다. 이런 손 모습을 ‘항마촉지인’이라는데 너무 어려워 듣는 둥 마는 둥합니다. 부처님 좌우로 두 보살님이 있는데, 외관이 비슷하여 화제도 돌릴 겸 둘의 차이를 묻습니다. “절에는 석가모니 부처 외에도 많은 부처가 계시는데, 이 분들은 깨달음을 얻고 이미 열반세계(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없는 세계)에 가셨고, 보살도 깨달음은 얻었으나 중생 구제를 위해,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에 아직 머물고 계십니다.” 그럼 인간 입장에서는 보살님이 더 좋은 분 아닌가하면서 토를 달려다 그만두었습니다. 부처님이나 보살님이나 마음속의 탐욕과 분노를 털어내야 한다는 한 가지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비움’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이겠지요.

중생을 구제하시는 대표 보살님은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음전’이라는 별도의 전각에 머물고 계시는데, 현세의 중생들을 헤아려 주시기에 가장 인기가 많습니다. 다른 절에서는 ‘원통전’이라고도 부른다하니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죄인의 마지막 한 명까지도 구제한 뒤에 부처가 되겠다고 하십니다. 계시는 곳은 ‘명부전’ 또는 ‘시왕전’입니다. 명부는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저승의 세계이고, 시왕은 지장보살을 돕는 열 명의 왕으로, 죽은 사람의 생전에 지은 죄를 심판합니다. 지옥을 다스리는 ‘염라대왕’도 시왕중의 한 명이라, 이곳을 찾는 불자들은 자신들 주변에 돌아가신 분이 행여 지옥에 가지 않도록 지장보살님께 간구합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이미지 확대보기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극락전’도 사람 발길이 빈번합니다. 극락은 영원히 죽지 않는 세계로 누구나 가고 싶은 곳이겠지요. 여기는 극락을 관장하는 아미타부처님이 좌장이십니다. 극락전이 아니라도 ‘무량수전’ 또는 ‘안양전’의 편액이 걸려있으면 그곳 역시 아미타여래가 계신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혹시 ‘약사전’이 보이신다면 지나치지 마시고 꼭 들르세요. 약사여래님은 질병을 고쳐주고, 목숨도 연장시키며, 예기치 못한 재앙도 막아주십니다.

둘러 본 전각 외에도 ‘미륵전’ ‘칠성전’ ‘산신전’ ‘대적광전’ 등 많은 전각에 또 다른 부처님과 보살님이 계신다하는데 다음 답사로 넘겨야겠습니다. 다만 좀 전에 살펴 본 전각들은 전통적인 민가의 ‘구복신앙(하늘에 복을 비는 것)’과 연계되어, 비움 보다 ‘비는 곳’의 성격이 다소 강하게 느껴집니다.

어느새 노을이 처마 끝에 매달린 물고기 풍경을 붉게 칠합니다. 사바의 세계로 돌아갈 때입니다. 그 때 어디서 나오셨는지 스님들이 일렬로 줄지어 가네요. 자연스럽게 스님들께 합장과 목례를 보냅니다. 스님들은 아마 ‘비워라’ ‘비워라’ 화답하시고 계실 겁니다. 불이문을 나서자 옆으로 조금 비켜난 곳에, ‘해우소’가 말을 겁니다. “아직도 비우시지 못한 것이 있으면 마저 비우시지요.”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