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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맨션-빌라-아파트로 주거형태 변천…서울은 고층 아파트와 콘크리트 빌딩 숲으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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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맨션-빌라-아파트로 주거형태 변천…서울은 고층 아파트와 콘크리트 빌딩 숲으로 가득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간추린 가옥 변천사
한국의 전통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옥.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한옥 내부는 크게 달라졌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한국의 전통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옥.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한옥 내부는 크게 달라졌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130여 년 전 인천의 작은 어촌마을에 외국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일본·중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생전 보지 못한 영국·미국·독일·프랑스·러시아, 심지어 스페인과 그리스인까지 껴 있습니다. 배에서 내린 그들은 곧이어 자신들의 살 집을 마련합니다. 온 목적은 대다수가 무역이었으나, 이를 알 까닭 없는 어촌 사람들은 외국인이 지어 놓은 다양한 가옥에 눈만 휘둥그레졌습니다.

일본 전통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다다미방.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일본 전통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다다미방. 자료=글로벌이코노믹

일본 다다미집도 신기했고, 중국(청나라) 벽돌집이나 서양식 페치카도 생소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관공서, 무역사무소, 각종 점포들이 늘어서고,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분주한 외국인들로 인해 보잘 것 없던 어촌마을이 ‘지구촌’으로 변모했습니다. 그 당시 이 지역을 ‘개항장’이라 불렀으며, 특히 나라별로 모여 살던 구역을 ‘조계지’라 하였습니다. 개항장은 각국의 사람뿐만 아니라, 집 모습도 서로 달라 마치 세계건축전시장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나라마다 집의 모습이 다른 이유는 그 나라의 주거환경이 달랐기 때문이지요. 우리 전통가옥인 초가나 기와는 4계절이 뚜렷한 기후에 적합했고, 습기가 많은 일본은 다다미를 까는 것이 제격이었을 겁니다. 중국 북방의 돌집이나, 서양에 석조건물이 많은 이유도 그 나라 주변에 석재가 흔했기 때문이겠지요. 이처럼 다양한 외국집들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지 얼마 안 되어 원래형태를 조금씩 바꿉니다. 일본 다다미집에 온돌이 설치되고, 중국 돌집에는 서양 벽난로나 거실이 꾸며졌으며, 양옥 지붕에 한옥기와가 얹혔습니다. 한옥도 마찬가지로 처마에 함석 물홈통을 덧대고, 흙 대신 벽돌로 공간을 나누었으며, 유리창이 문풍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개항 후 선교사들도 대거 국내에 들어왔는데, 이들은 조선인과 빨리 융화하고자 양식집을 짓지 않고 한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서양체질로는 한옥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깨 닫습니다. 미국 선교사중 한 사람인 ‘게일 목사’는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몇 가지 어려운 점들을 토로하였는데, 그 중 한옥생활과 관련해서 ‘좌식문화’를 가장 먼저 언급했습니다. 양반 자세로 앉아 식사나 대화를 하다보면 무릎과 엉덩이뼈가 끊어질 것 같아 너무 괴로웠다 합니다.

둘째로는 온돌방에서 잠자는 것인데, 추운 밤 아랫목에 누우면 처음에는 따뜻하고 기분이 좋지만, 시간이 갈수록 구들이 뜨거워져 흡사 빵이 오븐에서 구워지듯 몸이 달궈져 밤새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려고 건물 외관은 기와 한옥을 유지한 채, 대청은 유리문으로 막아 벽난로 있는 거실로 꾸미고 침대와 소파를 두어 ‘입식’생활을 하였습니다. 당시 이런 집들을 특별히 선교사 집으로 불렀습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는 우리나라 가옥역사에 분수령이 되는 시기입니다. 이 기간은 일제가 무단통치를 없애고 문화통치를 내세우며 유화적인 몸짓을 취한 때이기도 합니다. 일제의 검은 속내는 차치하고 어쨌든 외견상으로는 언론‧출판을 허용하고 조선인의 회사설립도 인정하였습니다. 건축사 면에서 서양식 ‘문화주택’이 이때 등장합니다. 외형은 지붕경사가 급한 방갈로 스타일로, 현관이 출입구이며 내부는 거실과 식당, 방의 구분을 뚜렷이 했습니다. 화장실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이고 다만 분뇨 배출은 밖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인은 방에 온돌을, 일본인은 다다미를 깔아 입식과 좌식을 혼용하였습니다. 문화주택의 소유자는 대개 상류층으로 서민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한편 문화주택의 또 다른 의미는 건축가가 미리 집을 짓고 수요자를 찾는 이른바 ‘기성품 주택’의 효시였다는 점입니다.

시골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초가.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시골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초가. 자료=글로벌이코노믹

그리고 이 당시 문화주택 같은 기성품 주택은 한옥에서도 나타납니다. 도시 산업화로 서울(경성)에 노동자들이 대거 몰려들자, 한옥 건설업자들은 이들을 상대로 한옥을 상품화하여 판매합니다. 이런 한옥을 ‘도시형 한옥’ 혹은 개량한옥이라 하는데, 당시 건축 왕이라 불리던 ‘기농 정세권’은 현재의 북촌 한옥 마을을 포함하여 성북, 서대문, 왕십리 등 여러 도처에 대규모 개량한옥단지를 조성합니다. 이 가옥의 특징은 안채와 문간채를 통합하여 좁은 공간의 효율성을 높이고, 문간채는 대문 옆에 바싹 붙여 주로 전세를 주거나 자녀들의 방 용도로 만든 점입니다.

마당 면적이 좁아서 변소는 안채에 딸리고 대청에 유리문을 달아 쪽마루를 복도로 이용한 것도 기존 한옥과 달랐습니다. 도시형 한옥은 이후 1960년대에까지 도심 곳곳에 중소 단위로 꾸준히 지어지던 대표적인 상품 한옥이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시발로 한반도는 전시체제로 전환됩니다. 식량생산도 광산 채굴도 총독부가 ‘영단’을 설립하여 계획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특히 1941년 설립된 ‘조선주택영단’은 1945년까지 2만호 공급을 목표로 공영주택 건설 계획을 발표합니다. 이는 군수물자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력을 한 곳에 밀집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공영주택은 ‘내선일체’ 일환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거주할 수 있었으며, ‘단지’라는 개념도 처음 도입됩니다. 서울 도림단지를 예를 들면, 외관은 목조 일본식이지만 방의 일부는 온돌을 채택했습니다. 단지 내에 인공녹지가 조성되었고 상가, 공중목욕탕, 이발관, 유아원과 탁아소를 같은 공간에 두었습니다. 가옥의 크기에 따라 구분하는 ‘형 개념’이 도입되어‘ 가장 큰 평수의 ‘갑형’은 단독 주택이고, 밑으로 을형에서 무형까지는 연립주택이었습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직업이 보장되는 도시 중상류층으로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도시 주택을 대표하는 아파트.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도시 주택을 대표하는 아파트. 자료=글로벌이코노믹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살다 간 집들(적산가옥)이 주택난의 숨통을 조금 열어 주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 6·25로 인해 우리의 가옥은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겨우 비바람이나 피하는 판자촌들이 하수 역할을 하는 청계천변에 닥지닥지하고, 산언덕의 움집들은 흡사 개미굴을 연상시켰습니다. 조선주택영단은 ‘대한주택영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급한 대로 흙벽돌에 시멘트로 마감한 9평짜리 ‘재건주택’을 도시 중심으로 공급하였습니다. 다행히 1958년부터 시멘트 생산이 본격화 되고, 연탄보일러도 일반화 되면서 시멘트 블록의 2층 연립주택이 그럭저럭 공급되었습니다. 홍제동 문화촌도 이즈음에 건설되었는데, 당시는 ‘부흥주택’이라 하였습니다. 15~20평으로 비록 흙벽돌집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고급 집에 속했고 이곳에 주로 문인들이 많아 문화촌이라는 별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편승하여 동네 곳곳에 허름한 가옥이 헐리고 ‘새마을 주택’이 들어섭니다. 지붕은 기와나 볏짚 대신 설치 간편한 슬레이트가 대세였고, 입식 부엌에 보일러 급탕설비를 갖춘 마루 겸 거실이 딸렸습니다. 평수도 10평에서 20평까지 다양했으며 온돌 보일러 덕분에 2층집도 가능했습니다. 새마을 주택은 1980년대 들어와 철골구조의 슬래브 다세대·다가구 연립주택으로 점차 바뀌어갔습니다.

한편 이 당시 최고의 설비를 갖춘 고급주택단지 ‘맨션’과 ‘빌라 타운’이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동안 유행하였지만 90년대에 와서 이 역시 다가구 주택으로 일반화 되었습니다.

아파트는 1930년대 문화주택이 유행할 당시 서울 회현동의 ‘미쿠니 아파트’나 충정로의 ‘도요타 아파트’ 등이 첫 선을 보였으며 대부분 일본인 전용아파트였습니다. 전쟁 후 건축계획에 따라 1957년 4~5층 3개동 152가구의 ‘종암 아파트’를 시작으로, 마포아파트(1961년), 서울시민아파트(1966년), 이촌동 공무원아파트(1966)가 건설되면서 우리나라 아파트의 새장을 열었습니다. 특히 마포아파트는 좌식 생활 방식을 입식으로 바꾼 최초의 아파트이며, 1964년 세워진 마포 2차 아파트는 계단식 설계로 거실과 베란다를 도입한 최초의 아파트로 기록됩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며 정부는 ‘건설로 경제성장’이란 구호와 함께, 정부 주도의 주공아파트를 짓고 민간 건설사의 참여도 적극 독려합니다. 동부 이촌동 한강맨션(1970년)과 여의도 시범단지(1971년), 그리고 소위 ‘강남개발’로 불리는 압구정 현대(1975년), 잠실지구(1976년) 등 한강 제방기능과 강변도로 건설로 생긴 매립지를 활용하여 대규모 강남 아파트를 조성합니다. 여기에 70년대 말부터 조합주택 건설 붐이 일어나고, 승강기를 갖춘 고층 아파트가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강남의 고층 아파트단지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건립되었으며, 특히 아시아선수촌(1986)·올림픽선수촌(1988)아파트는 설계를 현상 공모해 아파트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 복층아파트와 1층 정원 등이 도입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2000년대 아파트는 ‘웰빙’ 개념이 도입되어 피트니스센터와 함께 지상도 공원화합니다. 특히 상업용지에 주상복합아파트 건립이 허용되면서 이전보다 더욱 고급화·고층화되었습니다. 1999년 6월 착공해 2002년 10월에 완공된 서울 도곡동의 ‘타워팰리스’는 첨단 설비를 갖춘 한국 최초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란 명성을 얻게 됩니다. ‘래미안’ ‘e-편한 세상’ ‘아이파크’ ‘자이’ ‘푸르지오’ 등 아파트의 브랜드 시대가 열린 것도 이때입니다.

2010년대 오늘, 남산에서 바라보는 서울 모습은 그야말로 고층 아파트와 콘크리트 빌딩 숲입니다. 얼핏 보이는 궁궐과 일부 한옥마을을 제외하면 150년 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문화란 삶의 방식에 덧셈과 뺄셈을 거듭하며 현재에 나타납니다. 특히 주거문화는 환경과 밀접하기 때문에 산업이 발전된 지금 예전의 전통가옥을 고집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한국인으로 우리 주거문화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한번쯤 살펴 볼 필요는 있지 않겠습니까.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