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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고 구슬픈 아리랑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단절과 이별의 아리랑 넘어 희망과 약속의 아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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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고 구슬픈 아리랑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단절과 이별의 아리랑 넘어 희망과 약속의 아리랑으로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미래의 노래, 아리랑
경복궁을 중건할 때 전국에서 일꾼들이 모이면서 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더욱 풍성해졌다. 그러나 이별과 슬픔의 아리랑 고개는 이제 희망과 약속의 아리랑 고개로 승화되어야 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전국에서 일꾼들이 모이면서 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더욱 풍성해졌다. 그러나 이별과 슬픔의 아리랑 고개는 이제 희망과 약속의 아리랑 고개로 승화되어야 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예상대로 평창 올림픽 가락은 아리랑이었습니다. 세계인이 지켜보는 개막 공연에 천년의 소리 아리랑이 울려 퍼졌고, 시상식 배경음악도 아리랑 선율이었습니다. 아이스댄스에서 김유라와 갬린, 갈라쇼의 최다빈도 정선 아리랑을 주제곡으로 하여 진한 감동을 남겼고, 특히 올림픽 축하차 온 북한 공연단의 아리랑 연주는 많은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습니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구슬픈 이 아리랑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아리랑은 아리랑 후렴이 들어간 민요를 통칭합니다. 지역에 따라 ‘아로롱’, ‘아르랑’ 혹은 ‘어랑’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다 같은 범주에 넣습니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만 분분할 뿐 속 시원하게 밝혀진바 없지만, 오랜 세월 여러 사연을 담아내며 오늘날 50여종의 아리랑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부 민요학자들은 아리랑의 태생을 ‘메나리’에서 찾기도 합니다. 메나리란 한반도 동부지역에서 논밭을 맬 때 내는 소리로, 일종의 노동요 같은 것입니다. 강원도 명주군에 전해오는 아리랑 “심어주게 심어주게 오종종 줄모를 심어주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또는 이승훈이 채록한 농부사(農夫) 중 “밭 갈고 풀 뽑는 것은 공이 이루어지는 걸세 호미 드러라 호미 드러라 한 결 같이 앞을 향하여 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라는 노랫말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 합니다.

그러나 시원이야 어떠하든 대부분의 아리랑은 애정이나 주변 환경 혹은 전설을 엮어 다양하게 채색됩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 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강원도 아우라지 나루터의 전설을 배경으로 노래한 아리랑입니다. 강을 사이에 끼고 밀회를 즐기던 총각과 처녀, 어느 날 때 아닌 홍수로 나룻배가 유실되자 안달이 난 처녀가 뱃사공에게 하소연하는 사연입니다.

'정선 아리랑'을 탄생시킨 강원도 정선.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정선 아리랑'을 탄생시킨 강원도 정선. 자료=글로벌이코노믹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빠른 박자에 흥겨운 밀양아리랑은 음률과 달리 가사의 배경은 으스스합니다. 옛날에 밀양을 다스리던 한 부사에게 '아랑'이라는 예쁜 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랑에게 반한 관노가 사랑을 고백하자 아랑은 냉정하게 관노를 꾸짖었고, 증오심에 관노는 아랑을 겁탈하고 칼로 찔러 죽인 후 시신을 산에 버립니다. 부사는 딸을 찾지 못한 채 서울로 올라갔고, 이후 새로 오는 부사마다 부임한 첫날 밤 아랑귀신을 보고 죽습니다. 담력이 큰 한 부사가 와서야 아랑 귀신의 사연을 알게 되어 관노를 처벌하고 원혼을 풀어주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아랑의 정절을 '아랑아랑'하며 부르던 것이 밀양 아리랑으로 변했다 합니다.

한편, 이처럼 각각의 사연을 담아 부르던 지역 아리랑들이 한 장소에 모인 적이 있었습니다. 경복궁 재건이 한창이던 1860년대 후반입니다. 공사 노역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인부들이 동원되었는데, 그들의 입을 통해 자신들 고향의 아리랑이 어우러졌습니다. 그 중 가장 인기가 좋았던 아리랑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의 경기지역 아리랑으로 오늘날에도 아리랑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반면, 이 당시 경복궁 공사에 대한 원망을 풍자한 아리랑도 많이 회자되었습니다. “아르랑 아르랑 아르랑 얼싸 배 띄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 나간다.”와 “강원도 금강산 제일가는 소나무 경복궁 대들보로 다 나가네” 등의 아리랑이 그것입니다.

경복궁이 완성되고 고향으로 돌아간 인부들은 자연스럽게 타 지방 아리랑도 전수하고 혹은 새로운 가사를 붙여 신 아리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경복궁 공사가 빌미가 되어 여러 아리랑이 합쳐지다 보니 그때까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정서가 각지 사람들 가슴에 움텄습니다. 바로 아리랑이라는 것을 통하여 ‘우리’라는 동질의식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 ‘우리’는 기층민의 우리이고, 약자의 우리이며 나아가 백성의 우리, 민족의 우리로 각인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우리’라는 아리랑이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1894년 탐관오리의 수탈과 일본의 침략야욕이 노골화되면서 먹고살기 힘들어진 동학농민들이 죽창과 낫을 들었습니다. 이때 농민들을 이끈 군가가 아리랑이었습니다. 원곡은 전해지지 않으나 상주 아리랑에서 일부는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문전의 옥토는 어찌되고 쪽박의 신세가 웬일인가.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총 가진 포수가 원수로다.”

농민 군가는 아니더라도 당시 산간벽지의 아이들이나 포구 아이들까지도 입에 담던 아리랑도 있었습니다.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일본 놈 등쌀에 나는 못살겠네. 아이고 데고 귀찮고 성가시다. 단 둘이 살자 꾸나 싫다 싫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쑤 넘어간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하며 빠른 박자에 흥겨운 밀양아리랑은 음률과 달리 가사의 배경은 으스스하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하며 빠른 박자에 흥겨운 밀양아리랑은 음률과 달리 가사의 배경은 으스스하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뺏기자 아리랑은 민족 저항의 노래로 자리를 굳힙니다. 국토가 유린되고 해마다 백만 명 이상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시베리아로, 중국으로 흩어졌고 고난의 나날들을 보내면서 그나마 아리랑으로 달랬습니다.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이천만 동포야 어디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있네”

또한 이들 중에는 광복군이 되어 총칼을 앞세우며 광복 아리랑으로 전열을 가다듬기도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 날 찾으시거든 광복군 같다고 말 전해주소. 광풍이 분다네 광풍이 불어 삼천만 가슴에 광풍이 불어”

1926년에는 그야말로 민족 전체를 아리랑으로 묶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동안 노래로만 부르던 아리랑이 시각화 되면서 그 파급력은 엄청났고, 조선민중이라는 민족적 자각이 가슴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한’이라는 민족 고유의 정서를 잉태합니다. 더 이상 단절과 이별의 아리랑고개가 아니라 희망과 미래의 아리랑고개고, 극복하고 넘어서 이상적인 한 민족 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약속의 아리랑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1929년 광주학생의거에서 아리랑이 점화되자 일본은 서둘러 아리랑 금창령(禁唱)을 내립니다. 한반도에서 아리랑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속으로 아리랑을 읊었고 우리만의 공동체를 꿈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해방이 되자 한민족 누구나 할 것 없이 아리랑을 목청 터지게 불렀습니다.

노동민요에서 민중의 노래가 되고, 저항하던 민족의 노래가 된 아리랑. 일찍이 고 양주동 박사는 아리랑의 ‘아리’는 ‘우리’의 다른 말이라 하며, 아리랑 고개는 수난의 어려움을 견디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광명의 고개라 하였습니다. 외국의 어느 학자는 아리랑을 「한 민족의 상상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주문이라고도 합니다. 충분히 수긍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아리랑을 프리즘에 비출 수 있다면 다양한 색깔의 ‘한’의 정서가 나타날 것이고, 우리는 각기의 감정이 일 때마다 아리랑을 부를 것입니다. 아리랑은 현재보다 나은 미래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