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마음 산책(309)] 부모 소진(번아웃)

한국은 전 세계가 관심을 가질 만큼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5년 4월 인구동향’에 따르면 지난 4월 합계출산율은 0.79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출산율인 1.51명에도 못 미친다. 즉 한 여성이 가임기간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1명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갈수록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통계청이 지난 2023년 공개한 ‘장래인구추계: 2022~2027년’에 따르면 출생아 수는 오는 2072년 16만 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국가 차원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다양한 원인을 분석하고 정책들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낮은 출산율의 원인은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단기간에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녀 양육과 미래에 대한 경제적 부담 등이 크고, 부족한 보육 인프라나 직업 경력 단절 등의 사회적 요인도 만만치 않다. 또 자기실현을 중시하고 점점 더해지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심화 등 문화적 변화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제일 근본적인 요인은 양육자 사이의 관계 지속에 대한 불안감과 양육 기간 동안의 삶의 만족도 저하 및 양육에 대한 자신감 부담 등의 심리적 요인일 것이다.
심리적 요인 중에서도 점점 더 많은 부모들이 경험하고 있는 '부모 소진(parental burnout)'이 중요한 심리적 원인이다. 부모 소진(消盡)은 자녀 양육 과정에서 겪는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압박이 누적돼 정서적 고갈, 자녀에 대한 냉담, 부모 역할에서 효능감 상실 등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소진 상태다. 주요 증상으로는 항상 피곤하고 육아에 대한 감정적 거리감을 느끼고 이에 따른 죄책감이 증가한다. 또한 배우자와의 갈등이나 사회적 고립감의 증가 등 사회적 관계에서 증상이 나타난다.
부모는 자녀의 성장과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물리적·정서적·사회적·인지적 지원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자녀가 건강하고 행복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부모의 역할을 직업에 비유한다면 유능한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소위 ‘다중처리능력(multi-tasking)’이 필요하다. 이런 역할은 단일 과제만 해결하는 일에서는 얻을 수 없는 큰 보람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동시에 다른 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큰 압력과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으며, '부모 소진'은 이러한 압력과 스트레스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만큼 자녀 양육은 '소진'을 일으킬 확률이 많은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부모 역할을 성심껏 수행하는 과정에서 탈진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막중한 역할을 유능하게 처리해야 하는 부모는 무엇보다 먼저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 한마디로, 부모는 아프면 안 된다. 그러면 자신에게 맡겨진 다양한 역할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 소진'을 심각하게 다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진'을 더 깊이 다루기 전에 건강, 특히 마음의 건강에 대해 살펴보자. '소진'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의학에는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則不痛 不通則痛)’이라는 말이 있다. 해석하면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파진다”는 뜻이다. 즉 기와 혈이 원활히 순환되어야만 아프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아마도 마음의 건강 영역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건강의 본질은 원활한 사회적 관계 유무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계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즉 통하지 않으면 마음도 병들고 아프게 된다.
동아시아의 ‘관계중심’ 문화권에서는 서양의 ‘개인중심’ 문화에서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더욱 중요시한다. 한자의 사람을 뜻하는 ‘인(人)’ 자가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영어의 ‘human man’을 뜻하는 ‘인간(人間)’이라는 단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로 보는 문화에서는 당연히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느냐 못 맺느냐가 건강한 삶과 직결되어 있다.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도 결국 사람과의 관계, 즉 배우자 및 자녀와의 원만한 관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음도 몸과 마찬가지로 건강하지 않으면 결국 병든다. 한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은 화병(火病)이다. 화병은 화(火)가 풀리지 않고 쌓여서 생기는 병(病)이다. 화가 났어도 화를 잘 풀면 병이 생기지 않는다. 한자 화(火)는 ‘불’을 의미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화가 났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불이 났다는 뜻이다. 속에 불이 나서 지금 마음이 타들어 가면서 생기는 병, 즉 마음이 화상을 입는 병이 화병이다.
화가 쌓이면 화가 더 강렬해진다. 한자로 설명하면 화(火)가 두 개가 되는 것이다. 화(火)가 두 개가 되면 ‘불탈 염(炎)’이 된다. 화가 둘(炎)이 있다는 의미는 마음속에서 계속 강한 불이 붙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화병에 걸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화병의 증상은 겉으로 나타나면 폭력이 되고, 내부에서 타고 있으면 우울증이 된다.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은 화를 쌓아두지 말고 ‘말’로 푸는 것이다. 한자 '담(談)'자는 ‘말로 화를 푼다’는 뜻이다. 하지만 혼잣말을 하기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면 효과가 더 크다. 그래서 ‘담(談)’자 앞에 ‘서로 상(相)'자를 하나 더 붙이면 '상담(相談)'이 된다. 결국 상담은 '서로 상대방(相)의 마음속의 화(炎)를 대화(言)로 풀어주는 것'이다.
건강하고 효과적인 부모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소진'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상담을 통해 화를 푸는 것이다. 부모가 화가 나는 이유는 심리적으로 보면 일반 다른 역할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감정노동'으로 분류되는 직업군에서 '소진'이 쉽게 일어난다. 감정노동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노동이다. 상대에게 화가 나지만 그 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노동이다. 자녀 양육도 이런 의미에서 대표적인 감정노동에 속한다. 즉 자녀를 양육하면서 자녀와 갈등하고 화나는 것은 당연하다. 오죽하면 "너 때문에 엄마 속이 타들어 간다"라든지, 또는 딸에게 "너도 이다음에 딱 너 닮은 딸을 낳아라"라는 말을 하겠나? 하지만 부모는 자녀 때문에 생긴 화를 겉으로 표현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녀 교육에 역효과가 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야기되는 화를 제대로 풀지 못하면 '소진'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부모는 자녀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규범과 대인관계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양육자와 교육자로서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에 자녀들 앞에서 일상생활에서도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강하게 받는다. 자녀의 잘못이 자신이 교육을 잘 못한 결과라는 죄책감 때문에 용서와 관용의 본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감정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진'되지 않고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 편하게 상담받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상담에 대해 부정적 편견이 심하다. 오히려 부모가 상담받는다는 것은 자녀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통념이 강해 마음 놓고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할 수도 없다. 상담받는다는 것은 부모로서의 역할을 잘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오해하고 있다.
제일 좋은 상담소는 가정이고, 제일 좋은 상담자는 배우자다. 배우자와 대화를 통해 공감하고 어려움에 대해 서로 인정하고 위로해줄 때 부모는 자녀로 인한 화를 손쉽게 풀 수 있다. 우리는 부모가 되는 순간 자동적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슈퍼맨'이 되는 것이 아니다. 완벽한 부모가 되려고 지나치게 노력할 필요도 없고,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고 서로 비난해서도 안 된다. 부모 '소진'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거나 식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완벽한 부모가 되려고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고 화를 참아서 생기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마음 놓고 외치자. "나 좋은 부모 노릇 하려니 너무 힘들다. 나 좋은 부모 노릇 잠깐만 쉬고 마음껏 화낼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