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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아픔, 진솔하게 마주 대할 때 '치유의 싹'이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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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아픔, 진솔하게 마주 대할 때 '치유의 싹'이 튼다

[힐링마음산책(320)] 멈춰버린 시간, 다시 흐르다: 영화 속 애도와 회복의 심리학
지난 4월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식에서 진행된 뮤지컬 공연. 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지난 4월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식에서 진행된 뮤지컬 공연. 사진=뉴시스
2019년 개봉한 영화 '생일'은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자녀를 잃은 유가족의 삶을 그린다. 이종언 감독이 연출하고 설경구, 전도연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국가적 비극이 한 가정에 남긴 깊은 고통과, 그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재건의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한 재난영화가 아닌 이유이다.

푸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찾아온 예기치 못한 슬픔. 영화는 각자 고립된 채 슬픔을 견뎌내는 가족 구성원들을 비추며, 슬픔을 외면할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멈춰설 수 있는지 깊은 질문을 던진다. 상담자로서 이 영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아픔과 개인의 복잡한 슬픔, 즉 '복잡성 애도'라는 심리적 현실을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수작(秀作)이기 때문이다.

균열된 가족의 일상: 애도 상담이 필요한 이유


참사 이후, 아버지 정일, 어머니 순남, 그리고 어린 딸 예솔은 같은 집에 살지만 마음은 모두 따로따로 절망과 고독 속에 갇힌 채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슬퍼한다. 이들의 일상 속에는 사고가 난 그 순간 이후 '멈춰버린 시간'의 상징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 멈춰버린 시간과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일상을 보내고 있다. 보내기보다 일상을 힘겹게 버티고 있다. 이 상태가 곧 애도 상담이 필요한 이유다.

애도는 상실의 현실을 수용하고 감정을 정리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이 가족은 고통에 압도되어 이 과정을 회피한다. 특히 어머니 순남의 경우 이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다. 순남은 아들 수호의 방을 참사 이전 모습 그대로 보존한다. 이는 슬픔을 인정하는 순간 고통에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부정(Denial)'과 '회피'의 만성화된 형태다.

순남의 심리는 아들의 생일날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을 만들지만 정작 밥상에는 앉지 못하고, 다른 가족과의 소통마저 거부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순남은 다른 유가족 모임이나 관계자들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한다. 다른 사람의 슬픔과 연결되는 순간 억제해온 자신의 감정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될까 두려워, 아예 고통의 근원을 차단하려는 강력한 회피의 방편이다. 남편 정일이 오랫동안의 해외 근무를 마치고 뒤늦게 돌아왔음에도,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분노 때문에 그를 멀리한다.

슬픔이 해소되지 못하고 억압될 때, 애도 과정은 정지되고 만성화된 우울과 관계 단절로 나타난다. 이러한 회피는 애도 과정을 멈추게 하고 가족 관계를 왜곡한다. 남편 정일은 사고 당시 한국에 없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침묵하고, 딸 예솔은 생존자로서의 미안함과 부모를 배려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슬픔을 숨긴다. 각자의 고립된 슬픔이 가족 간의 정서적 단절을 심화시키는 상태, 즉 '복잡성 애도'에 빠지게 된다. ‘복합성 애도’란 일반적인 애도 반응이 건강하게 해소되지 못하고 만성화되거나 병리적인 행태로 진행되어 일상생활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런 상태에 빠질 때는 심리적 개입이 필수적이다. 상담은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할 안전한 통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딸 예솔의 행동은 상담자로서 많은 애처로움을 느끼게 한다. 예솔은 살아남았다는 미안함과 함께, 극심한 슬픔 속에 있는 부모에게 자신의 슬픔마저 부담이 될까 두려워 표현하지 못한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집에서는 부모의 기분을 살피는 '작은 어른'처럼 행동한다. 이는 비극을 겪은 가족의 남은 아이들이 흔히 겪는 마음의 고통이다.

애도 해소의 심리적 접근: 터널을 지나 빛으로


애도 상담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실을 잊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수학여행을 떠나는 들뜬 마음으로 현관문을 나간 금쪽같은 자식이 시신으로 돌아온 슬픔을 잊을 수 있나? 그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잔인한 일이다. 오히려 상실의 고통을 충분히 인정하고 그 감정을 정리한 뒤, 떠난 이와의 관계를 마음속에 건강하게 간직한 채 남겨진 이가 현재의 삶을 다시 시작하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상담은 고통을 외면하는 회피 상태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돕는다.

애도 상담은 크게 세 단계로 구현된다


첫 번째는 상실을 직면하고 감정을 언어화하는 단계다. 상실의 현실을 수용하고 슬픔, 분노, 죄책감 등 억압된 감정을 안전하게 표현하는 '직면'의 단계이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고통을 말로 꺼내놓는 것이 이 단계의 핵심이다. 이는 영화 속에서 순남이 마침내 수호의 방을 비우고 남편과 함께 유품을 정리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으로 잘 구현된다. 순남과 정일이 수호의 방을 정리하며 눈물 속에서 아들의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행위는, 억압했던 슬픔을 끄집어내어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직면'의 시작이다.

두 번째는 관계를 통합하고 의미를 재구성하는 단계다. 고인과 함께했던 삶의 기억과 경험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는 '통합'이 이 단계의 핵심이다. 이는 떠난 이와의 '연속적 유대'를 건강하게 확립하는 과정이다. 영화에서는 아들의 학교 친구들이 순남에게 찾아와 아들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순남은 이 이야기를 통해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비극이 아닌 '성장과 사랑의 기억'으로 통합하고, 아들의 삶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새롭게 바라본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일상적 삶을 회복하고 고인이 없는 일상에 재적응하는 단계다. 상실 이후의 삶에 재적응하고 새로운 역할과 관계를 맺으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회복'을 이루는 단계다. 슬픔의 해소는 상실의 경험을 우리 삶의 이야기 속에 녹여내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 단계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수호의 생일 모임에서 정점을 찍는다. 가족과 이웃, 친구들이 함께 모여 생일상을 차리고 수호를 기억하는 행위는 아들과의 사랑과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현재의 삶 속에서 계속 이어가는 건강한 슬픔 극복 방식이다. 정일이 아내의 손을 잡고 수호에게 편지를 읽을 때 순남이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기대는 모습은, 부부가 비로소 고통의 짐을 공동으로 지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찾았음을 보여준다.

치유를 통해 관계 속에서 희망을 재구성하다


상실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그 흔적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은 비로소 서로의 고통에 진정으로 공감하며 '다시 마음으로 연결'된다. 영화 '생일'이 제시하는 회복의 과정은 동시에 인간적인 성숙의 과정이다. 고난과 상실을 겪었을 때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사랑'과 '연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족이 함께 밥을 먹으며 미소 짓는 모습은,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을지라도 고통의 짐을 공동으로 지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찾았음을 보여준다.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2025년 을사년(乙巳年)도 저물어가고 있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동시에 개인적으로도 기뻤던 일도 있었지만 속상했던 일도 많았을 것이다. 특히 사랑했던 대상을 잃은 슬픔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했을 수도 있다.

사랑했던 대상이 꼭 가족이나 친밀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애지중지했던 반려동물을 잃을 수도 있고, 아끼던 물건을 잃을 수도 있다. 조선 순조 때 유씨 부인이 쓴 '조침문(弔針文)'은 부러져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바늘을 애도하는 대표적인 옛 문헌이다. 이 작품은 바늘을 의인화해 17년간 동고동락한 바늘의 공로를 회고하고 부러진 순간의 슬픔을 애절하게 표현하며, 홀로 사는 외로움과 한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며 이별의 감정을 승화한다.

영화 '생일'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한다. "슬픔의 무게에 갇혀 관계를 단절할 것인가, 아니면 그 무게를 함께 들어 올리며 상실 너머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이 영화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치유와 희망이 싹틀 수 있음을 증언하는 뛰어난 애도 상담의 보고서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더 정확히 말하면 잊으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늪처럼 상실과 슬픔의 사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매몰된다. 슬픔과 아픔은 회피하지 않고 진솔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대면할 때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주위에 감정을 억압하고 회피하고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이웃이 있다면 섣불리 잊으라고 종용하지 말고 조용히 다가가 손을 잡으며 나직이 속삭여주자. “슬퍼해도 괜찮아. 아파해도 괜찮아.”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 “그 마음 나도 알아”라고 다정하게 말하며 같이 눈물을 흘리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이미지 확대보기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