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그런데 요즘 새로 지은 아파트나 새롭게 정비된 단지를 보면 이런 높은 담장이 많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나무와 화단, 잔디밭과 산책로가 대신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아파트 단지라기보다 작은 공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곳은 담장 없이 조경만으로 단지의 경계를 표시한다. 겉모습만 보면 우리 주거 문화도 이제 닫힌 모습에서 벗어나 열린 모습으로 바뀐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담장이 낮아졌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열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여러 아파트 단지에서 놀이터 출입 문제를 두고 논란이 반복되고 있다.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에 외부 어린이들이 들어와 놀아도 되는가 하는 문제다. 어떤 아파트에서는 외부 어린이의 출입을 금지했고, 어떤 곳에서는 외부인이 놀이터를 이용할 경우 부담금을 내게 하겠다고 했다. 또 몇 년 전에는 단지 안 아이들과 외부 아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인식표를 채웠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 한쪽이 씁쓸해진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며 놀았다. 우리 집 앞 놀이터, 옆 동네 놀이터를 크게 구별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놀이터는 누가 돈을 내고 관리하는 시설이기 전에 함께 뛰어노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경계를 잘 몰랐고, 어른들도 어느 정도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한 놀이터 사용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중요한 심리적 변화가 담겨 있다. 눈에 보이는 담장은 낮아졌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의 담장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콘크리트 담장과 철제 펜스가 안과 밖을 나누었다. 지금은 그런 물리적 담장이 사라진 자리를 다른 말들이 대신하고 있다. ‘입주민 전용’, ‘외부인 출입 금지’, ‘관리비 부담’, ‘책임 소재’, ‘사유재산’ 같은 말들이 새로운 담장이 되고 있다. 담장은 낮아졌지만 사람들 사이의 경계는 더 예민해졌다. 아이들의 손목에 인식표를 채우는 일은 우리가 얼마나 불안한 방식으로 경계를 다시 만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문화의 겉모습과 속마음을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 문화에는 눈에 잘 보이는 부분이 있다. 건물 모양, 주거 방식, 조경, 제도, 생활 양식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은 비교적 빨리 바뀐다. 돈이 투입되고, 정책이 바뀌고, 유행이 달라지면 몇 년 사이에도 크게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생각과 감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오늘의 아파트 문화가 겪고 있는 갈등은 바로 여기에서 생긴다. 우리는 서구식 개방 공간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담장을 낮추고, 산책로를 만들고, 정원을 꾸미고, 공원 같은 아파트를 선호한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우리 단지’, ‘우리 주민’, ‘우리 아이’, ‘우리 재산’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작동한다. 공간은 열렸지만 마음은 아직 닫혀 있는 셈이다. 겉모습은 공원처럼 바뀌었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성을 쌓고 있다.
고(故) 이어령 교수는 명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창호지와 유리의 차이를 통해 동서양의 공간 감각을 설명한 적이 있다. 유리는 눈으로는 안과 밖을 훤히 보이게 하지만, 소리는 막는다. 반면 창호지는 시선은 부드럽게 가리지만, 소리와 바람은 은은하게 통과시킨다. 유리가 눈으로 확인하는 문화를 보여준다면, 창호지는 기척을 느끼는 문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귀'의 문화이고, 서양은 '눈'의 문화이다.
이 차이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서구권에서 많이 쓰이는 이모티콘은 대체로 입 모양을 바꾸어 감정을 나타낸다. 웃을 때는 :), 슬플 때는 :(, 놀랄 때는 :O처럼 입 모양이 감정의 핵심이 된다. 반면 한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권의 이모티콘은 눈 모양이 훨씬 중요하다. 웃을 때는 ^^, 슬플 때는 ㅠㅠ, 난처하거나 당황할 때는 ;;, 못마땅하거나 삐친 느낌은 --처럼 눈의 변화가 감정을 표현한다.
한국의 전통 공간도 이와 비슷했다. 남을 정면으로 노출시키기보다 적당히 가려주었다. 그러나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았다. 시선은 부드럽게 가렸지만, 소리와 기척은 받아들였다. 남의 집 안을 노골적으로 들여다보지 않는 것은 예의였고, 이웃의 기척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는 것은 함께 사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현대 아파트는 이런 전통적 완충 장치를 충분히 이어받지 못했다. 겉으로는 서구식 개방 공간을 만들었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더 예민해졌다. 남의 시선도 싫고, 남의 소리도 싫고, 남의 아이도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조경과 열린 산책로, 공동체적인 분위기는 원한다.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과거에는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어느 정도 ‘사람 사는 기척’으로 받아들이는 면이 있었다. 물론 과거가 늘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참고 살라는 말이 누군가의 고통을 덮는 말로 쓰인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적어도 이웃의 기척을 완전히 없애야만 내 삶이 안전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이웃의 소리를 쉽게 내 권리에 대한 침해로 느낀다. 위층의 발소리는 단순한 생활 소음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공격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현대인의 마음은 예민해졌고, 내 공간을 지키려는 욕구도 강해졌다. 문제는 그 마음이 지나치게 커질 때 이웃은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불편한 침입자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한국인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개방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통제를 원한다. 소통을 말하지만 내 영역이 조금이라도 침범당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워한다. 공동체를 말하지만 비용과 책임의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소유권의 언어로 돌아간다.
물론 이것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현대사회에서는 안전과 책임이 실제로 중요하다. 누군가 다치면 법적 문제가 생기고, 시설을 유지하려면 돈이 든다. 선의만으로 공동체를 운영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파트 주민들이 관리 기준을 세우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사실 건강한 삶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가정에도 사생활이 필요하고, 공동주택에도 관리 원칙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무조건 열어두는 것이 성숙한 태도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경계의 성격이다. 그 경계가 서로를 지켜주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타인을 밀어내기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경계가 예의가 될 수도 있고, 차별이 될 수도 있다. 울타리가 될 수도 있고, 성벽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담장의 높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구조다. 콘크리트 벽을 없애고 나무를 심었다고 해서 저절로 열린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간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를 도울 수는 있지만, 마음을 대신 바꾸어 주지는 못한다.
오늘의 아파트는 한국 사회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구별이 혐오와 배제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 나의 권리를 지키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타인을 늘 불편한 침입자로만 여긴다면 공동체는 사라진다. 결국 우리는 함께 살고 있지만, 함께 사는 법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파트의 담장은 낮아졌다. 이제 낮아져야 할 것은 우리 마음속 담장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서구식 아파트라는 공간 안에서도 한국적 관계의 따뜻함을 잃지 않는 새로운 주거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확대보기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