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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우크라이나 전쟁서 아프리카 세 청년 ‘의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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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우크라이나 전쟁서 아프리카 세 청년 ‘의문의 죽음’

우크라이나 전쟁은 양국 국민뿐만 아니라 제3 국가 젊은이들의 희생도 강요하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
우크라이나 전쟁은 양국 국민뿐만 아니라 제3 국가 젊은이들의 희생도 강요하고 있다.

전쟁의 비극은 엉뚱한 곳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우크라이나의 도시 바흐무트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에서 사망한 수천 명의 러시아 바그너그 전사들 가운데 뜻밖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탄자니아의 가장 큰 도시인 다르에스살람 출신의 네메스 타리모는 작년 10월 24일 바흐무트 바로 남쪽에 있는 오드라디브카 마을에서 우크라이나군의 포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의 지휘관은 타리모의 죽음에 대한 보고서에서 “건장하고 둥근 얼굴을 가진 32세 아프리카 청년으로 용기 있고 유능한 전사”라고 썼다. 그는 누구일까?

타리모는 4년 전 야망으로 가득 찬 청년의 꿈을 안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는 모스크바의 유서 깊은 푸시킨 대학의 러시아어 과정에 등록했다. 이후 모스크바의 러시아 기술 대학교에서 IT 분야 대학원 과정으로 편입했다.

그의 사촌은 "타리모는 큰 꿈을 갖고 있었다"며 자신의 형제를 소개했다.

탄자니아에서 러시아로 여행하는 동안, 타리모는 1960년대부터 미래의 국가 원수들을 포함한 많은 젊은 아프리카인들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구소련 시절부터, 모스크바는 서유럽의 식민지 지배에서 막 벗어난 나라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프리카 학생들에게 팔을 벌렸다.

지금도 약 3만5000명의 아프리카 학생들이 러시아의 각 대학에 등록되어 있다.

타리모의 ‘러시안 드림’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바그너그룹에 몸을 담고 우크라이나에서 무기를 손에 들어야 했다. 이 그룹에는 타리모뿐 아니라 잠비아 청년인 레메카니 니렌다와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코메난 아보야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안 드림’을 꿈꾼 가난한 청년들은 곧 범죄에 빠졌고 마약 혐의로 수감되었다.

이들은 교도소에서 썩는 대신 우크라이나에서 6개월 동안 군인으로 복무하는 대가로 바그너그룹의 사면 제안을 받아들인 수만 명의 러시아 수감자들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비슷한 이유로 수감된 죄수들과 아프가니스탄이나 아랍 국가들에서 자원한 용병들과 함께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됐다.

러시안 드림


이 세 남자는 평소 러시아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다른 서구 열강들과 달리 러시아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두지 않았다. 제국주의 착취와 무관한 탓에 여느 유럽 국가들과 러시아는 다르게 다가왔다.

아프리카에서 많은 학생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모스크바의 인민우호대학의 케냐 강사 클레어 아무하야에 따르면 구소련 시절 아프리카 독립운동과 백인 소수통치에 대항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회의의 무장단체를 지원하면서 러시아는 아프리카와 정서적 유대감을 띠기 시작했다.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유럽연합 및 미국과 훨씬 더 중요한 무역균형을 유지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대체로 중립적인 입장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의 유대감은 지금까지 지속된다.

지난해 3월 유엔 총회에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비난 결의가 압도적으로 가결되는 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포함한 아프리카 17개국은 기권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잠비아의 대통령들은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중재를 모색하고 있는 아프리카 지도자들 중 하나다.

미국에서 유출된 정보에 따르면, 바그너그룹은 지난 10년 동안 적어도 아프리카 8개국에서 활동하면서 몇몇 아프리카 정부들과 강력한 관계를 강화해 왔다.

타리모는 탄자니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그의 대가족은 그를 다르에스살람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교외인 음베지콰 음스구리에서 키웠다. 그의 소셜미디어 프로필은 그가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물류회사의 회계사로 일한 사실을 보여준다.

타리모의 사촌은 "그는 야망이 있었다. 컴퓨터와 독서를 사랑하는 조용하고 대립적이지 않은 형제였다. 그는 외국으로 이주한 후에도 그의 조국에서 사업이나 정치 경력을 시작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타리모는 러시아에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해변 휴양지인 소치, 모스크바 금융가의 고층 빌딩, 그리고 그의 언어연구소의 문화 축제에서 찍은 사진을 올렸다. 2018년 12월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연설한 모스크바의 국제 청소년 회의에도 참석했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아프리카 청년 타리모의 사진.이미지 확대보기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아프리카 청년 타리모의 사진.


범죄에 빠진 청년


2020년 그는 잠시 탄자니아에 돌아왔다. 그는 탄자니아의 주요 중도우파 야당인 차드마의 의회 후보가 되려고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친척들에게 그의 약혼녀가 임신했고 출산을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모스크바로 돌아간 타리모와 연락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는 자주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이 무렵 범죄에 빠져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타리모는 2021년 1월 남부 모스크바의 주택가에서 체포되었다. 법원 서류에 따르면, 경찰관들은 눈 속에 물건들을 숨기고 있는 그를 봤다고 보고했다. 법원 문서에는 그가 유통할 준비가 된 작은 다발로 나눠진 8.33g의 마약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법원은 면회와 서신 왕래, 영치금 제한 등 까다로운 조건의 감옥에서 7년 형을 선고했다. 법정에 있던 한 사람은 타리모가 재판을 받는 동안 자신의 범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고 선고가 발표되었을 때 충격에 빠졌다고 전했다.

바그너그룹의 서류에 따르면 타리모는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267㎞ 떨어진 리빈스크시에 있는 야로슬라블 지역의 형사 2호 식민지에 수감되었다.

타리모의 친구들은 그가 마약에 관여하게 된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와 같은 기숙사에서 지낸 콩고 출신 친구는 "그 얘기를 듣고 믿기지 않았다. 그는 매우 침착하고 진지한 청년이었다"고 말했다.

바그너 용병


타리모는 수감된 지 18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교도소에 있다는 사실이 친척들에게 알려졌다.

그는 2022년 8월 24일 바그너그룹에 합류했다. 러시아 독립 뉴스사이트 미디어조나에 따르면 그는 400명에 이르는 죄수들과 함께 야로슬라블 지역의 교도소를 떠났다.

아프리카 청년은 바그너 용병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돈바스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그들은 아프리카 출신들을 동물 취급했다.

탄자니아의 몇몇 언론 보도에 따르면, 타리모는 10월에 마지막으로 친척들과 연락을 취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이 원한다면 2023년 1월에 탄자니아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타리모는 2022년 10월 24일 전사했다. 한 달 전 그의 친구 니이렌다가 우크라이나군의 참호 습격을 받고 사망했다.

니이렌다는 2022년 9월 22일 가족과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지 불과 3주 만에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죽었다. 프리고진은 "그는 영웅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프리고진은 그가 누군지도 모를 것이다. 니이렌다는 22살이었다.


성일만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texan509@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