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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110억 달러 채권 '기후 위험 공시 누락' 의혹… 싱가포르 거래소에 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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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110억 달러 채권 '기후 위험 공시 누락' 의혹… 싱가포르 거래소에 피소

기후단체 "2050년까지 석탄 의존· LNG 변동성 등 중대 위험 공개 안 해"
SGX, 신고 접수 후 검토 착수...'위장환경주의' 논란 속 아시아 금융시장 파장 주목
한국전력공사가 필리핀 세부주 나가시에 운영 중인 200메가와트(MW)급 석탄화력발전소의 모습. 한전은 2022년 대규모 손실 이후 해외 석탄과 가스 자산 매각을 추진하고 있으나, 해당 발전소는 계속 가동 중이다. 사진=한국전력 SPC이미지 확대보기
한국전력공사가 필리핀 세부주 나가시에 운영 중인 200메가와트(MW)급 석탄화력발전소의 모습. 한전은 2022년 대규모 손실 이후 해외 석탄과 가스 자산 매각을 추진하고 있으나, 해당 발전소는 계속 가동 중이다. 사진=한국전력 SPC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가 110억 달러(약 15조 359억 원) 규모 채권 발행 과정에서 중대한 기후 관련 위험 공시를 빠뜨린 혐의로 싱가포르 증권거래소(SGX)에 제소당했다고 에코 비즈니스가 지난 26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한전이 2050년까지 석탄 발전에 의존하고 변동성 큰 가스 가격에 노출되는 등의 위험 정보를 투자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 이번 소송의 주요 내용이다. 싱가포르 증권거래소는 이 신고를 받아 검토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액화천연가스(LNG) 사업 지연과 취소로 공급 차질이 생겨 한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도, 이러한 재정적 노출 또한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최대 전력회사인 한전은 2022년 큰 손실 뒤 해외 석탄과 가스 자산 매각을 논의해왔지만, 필리핀 세부 나가시에 있는 200메가와트(MW) 규모 석탄 발전소를 계속 운영하고 있다. 한전은 2024년 9월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해외 자산 매각을 공식 발표했고, 이를 통해 신재생에너지와 녹색수소 등 새로운 사업에 다시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세부 발전소 매각은 아직 마치지 못했다.

기후변화 대응 비영리단체 '기후솔루션(SFOC)'이 이번 소송을 제기했다. 기후솔루션은 지난 26일 싱가포르 증권거래소 규제 당국(SGX RegCo)에 낸 신고서에서 한전이 투자설명서에 여러 중대한 기후 관련 위험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2050년까지 이어질 석탄 발전 의존도와 변동성 큰 액화천연가스(LNG) 가격에 대한 재정적 노출 등이 들어있다.
◇ 공시에서 빠진 핵심 '기후 위험'과 '무탄소' 주장의 허점

기후솔루션은 한전 투자설명서에 의미 있는 기후 관련 정보가 거의 없다고 지적하고, 채권으로 마련한 자금 일부를 호주 바로사 가스전 같은 해외 신규 화석연료 사업에 쓸 수도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실제로 싱가포르 증권거래소 상장 규정은 투자자가 기업의 사업, 재무 상태, 전망과 위험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정보 공개를 요구하지만, 한전 채권 투자설명서에는 기후 관련 위험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기후(climate)'라는 단어조차 한 번만 나올 뿐 제대로 된 설명은 없었다는 점이 문제로 꼽혔다.

한전의 주요 주주는 국책은행인 한국산업은행과 대한민국 정부이며, 두 기관이 가진 지분은 총 51%에 이른다.

또한 한전이 수소-LNG 혼소 발전과 암모니아-석탄 혼소 발전을 '탄소중립' 또는 '무탄소(carbon-free)'로 적은 점도 논란이다. 전문가들은 이 혼소 방식이 돈이 많이 들고, 오히려 석탄만 태울 때보다 온실가스를 더 많이 내뿜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후솔루션 강송이 변호사는 "한전의 부실한 공시는 투자자와 대중을 잘못 이끌어 기후 위기 해결의 시급성에 대해 그릇된 안도감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하고, 한전이 채권 상장 규정을 어겼을 가능성을 말했다.

싱가포르 증권거래소 대변인은 현지 언론에 "불만 사항을 받았으며, 모든 불만 사항처럼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싱가포르 증권거래소는 이번 신고 건과 관련해 한전 이사회에도 관련 내용을 알릴 예정이다. 한전 쪽은 이번 일에 대한 논평 요청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 국제사회 압력과 투자자들의 외면 현실화

이번 신고는 파리협정에 따른 지구 온도 상승 1.5도 제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각국 정부와 기업에 탈탄소화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나와 눈길을 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청정에너지 전환 과정의 재정적 위험을 경고하고, 석탄 발전소 단계적 폐쇄를 비롯한 화석연료 사용의 빠른 감축을 꾸준히 요구해왔다.

지난해 국제지속가능성표준위원회(ISSB)는 기업이 투자자에게 기후 관련 위험과 기회를 효과적으로 알리도록 새로운 공시 기준을 발표했다. 이 기준은 2024년 1월 1일부터 효력이 생겼고, 싱가포르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의무화할 예정이다.

기후솔루션은 한전의 공시 누락이 잠재 투자자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전은 계속 손실을 보고 있으며, 지난 3월에는 2023년에 4조 5700억 원(약 33억 달러) 순손실을 냈다고 발표했다. 앞서 2022년에는 에너지 가격 급등 때문에 24조 6000억 원이라는 기록적 손실을 보았다.

기후솔루션은 한전 재정난이 화석연료에 대한 높은 의존도와 에너지 가격 변동성 노출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현재 한전의 탈탄소화 계획이 국제 기후 목표와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한전은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이룬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그 과정에서 석탄 발전을 계속 쓸 계획이며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외국에서도 석탄 발전소를 돌리고 있다.

이번 채권 발행에는 씨티그룹, HSBC,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 같은 세계적인 대형 금융기관이 주간사로 참여했다고 알려졌다. 또한 블랙록, 뱅가드, 메트라이프 등도 주요 투자자로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이들이 이번 싱가포르 증권거래소 상장 채권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한편, 한전의 높은 석탄 의존도와 부족한 기후 대응 때문에 네덜란드 연금자산운용(APG), 스웨덴 국민연금기금(AP7) 등 일부 세계 연기금은 이미 한전에서 투자 회수를 결정했다.

한전은 2019년부터 2022년 사이 국제 녹색 채권 발행을 두 배 넘게 늘렸지만, 실제 자금 사용 내역의 투명성이 모자라고 일부 자금이 화석연료 사업에 쓰였다는 비판도 받았다.

◇ SGX의 결정, 아시아 기후 공시 기준 시금석 될까

강 변호사는 "한전은 기후 관련 위험을 제대로 공개하고 파리협정 목표에 맞는 믿을 만한 탈탄소화 계획을 세워 투자자와 대중의 믿음을 되찾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전의 이번 싱가포르 증권거래소 채권 발행 관련 기후 위험 미공시 논란은 단순히 한 기업의 문제를 넘어, 국제 금융시장에서 기후 위험 공시 의무와 위장환경주의(그린워싱)에 대한 규제 강화 흐름과 이어져 있다. 싱가포르 증권거래소는 최근 기후 위험과 위장환경주의 규제 강화 흐름 속에서 이번 일을 중요한 시험대로 여길 가능성이 크며, 이곳의 최종 판단은 앞으로 아시아 금융권의 기후 공시 기준과 투자자 보호 정책에 중요한 앞선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