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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인류가 만든 가장 복잡한 기계’ ASML, 美·中 무역전쟁에 흔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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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인류가 만든 가장 복잡한 기계’ ASML, 美·中 무역전쟁에 흔들리다

ASML의 고수차 극자외선(EUV) 클린룸 내부 모습. 이 업체는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복잡한 리소그래피 장비를 제작한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ASML의 고수차 극자외선(EUV) 클린룸 내부 모습. 이 업체는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복잡한 리소그래피 장비를 제작한다. 사진=로이터
세계 유일의 첨단 리소그래피 장비 제조업체인 네덜란드 ASML이 미·중 기술패권 경쟁의 정점에서 외교와 무역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수백억 달러 규모의 첨단 반도체 생산 장비를 독점 공급하고 있는 이 회사는 글로벌 공급망과 산업안보의 교차점에 놓인 채 점점 거세지는 규제와 압박 속에서 미래 전략을 다시 짜고 있다.

7일(이하 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인터뷰에서 “정부 정책 하나로 수십년간 이어온 반도체 공급망이 흔들리고 있다”며 “이는 인공지능 기술 발전 속도를 늦추고 중국의 반도체 국산화를 오히려 가속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ASML이 생산하는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는 한 대 가격만 약 4억 달러(약 5540억원)에 달하며 트럭 여러 대 분량의 부품이 들어가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기계’로 평가된다. 미국, 유럽, 아시아 수백 개 기업이 부품을 공급하고 있어 글로벌 협력 없이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장비는 스마트폰, 인공지능(AI) 칩, 자율주행차 반도체 등 차세대 기술의 핵심을 담당한다. 지난해 ASML의 매출은 283억 유로(약 43조3000억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2030년까지 440억~600억 유로(약 6조4000억~8조8000억원)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산 제품에 50%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가 이틀 만에 철회하는 등 ASML의 사업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중국에 대한 수출 규제 완화를 논의하려다 내각 붕괴로 협상이 중단됐고, 미국은 지난 2019년부터 EUV 장비의 대중 수출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를 설득해왔다. 바이든 행정부도 여기에 더해 구형 장비까지 규제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로 인해 지난해 2분기까지만 해도 전체 매출의 절반을 차지했던 중국 매출 비중은 현재 약 25%까지 떨어졌다. 반면, 대만과 한국이 최대 시장으로 부상했다. ASML 장비 없이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푸케 CEO는 “중국을 막으려는 장벽이 오히려 자립 의지를 자극하고 있다”며 “막을수록 더 열심히 기술을 따라잡으려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화웨이를 포함한 중국 기업들이 ASML 전 직원을 채용해 자체 장비 개발에 나섰다는 보고도 나온다.

조지타운대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그레고리 앨런 연구원은 “중국이 가장 뒤처져 있는 분야가 리소그래피 기술이며 가장 나중에 따라잡을 분야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은 이미 구형 장비를 비축해 저사양 반도체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ASML은 현재 미국 워싱턴, 유럽 브뤼셀, 네덜란드 헤이그에 로비팀을 확충하고 있다. 푸케 CEO는 “정치가 기술을 흔들게 놔둬서는 안 된다”며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보호주의를 강화하면 결과적으로 모든 기술 발전이 늦어진다”고 경고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