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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가격 폭락·가뭄 이중고… 미국 상징 '황금빛 밀밭'이 스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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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가격 폭락·가뭄 이중고… 미국 상징 '황금빛 밀밭'이 스러진다

5년 만의 최저가에 생산비도 못 건져… 농가, 수확 포기 속출
옥수수·콩으로 작물 전환 가속화…'국가 상징'의 쓸쓸한 퇴장
2025년 6월 12일 미국 오클라호마주 크렘린의 한 농장에서 데니스 쇤할스가 밀 이삭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2025년 6월 12일 미국 오클라호마주 크렘린의 한 농장에서 데니스 쇤할스가 밀 이삭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로이터
미국 중부 곡창지대의 상징인 '황금빛 밀밭'이 사라지고 있다. 5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폭락한 가격과 고질적인 수익성 악화에 시달리는 농부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가꿔온 밀밭을 스스로 갈아엎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미국 전체 밀 재배 면적은 40% 넘게 급감했으며, 한때 미국 최고의 작물로 꼽혔던 밀의 자리는 이제 옥수수와 콩, 심지어 풍력발전기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지난 20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텍사스에서 몬태나에 이르는 미국 '밀 재배지대' 전역의 농가들은 올해 일찌감치 손실을 줄이는 선택을 했다. 밀을 식용으로 수확하는 대신 가축 사료용 건초로 만들거나, 아예 밭을 갈아엎고 가축 방목지로 바꾸고 있다. 네브래스카주의 밀 재배 면적은 2005년에 비해 절반 아래로 줄었다.

데니스 쇤할스 오클라호마주 밀 재배자 협회 회장은 지난 5월 연례 작황 조사를 위해 밭을 둘러봤지만, 이미 일부 밭의 수확을 포기했다. 쇤할스 회장은 "농부들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며 "다른 작물로 바꾸거나, 파산하게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 풍년 들어도 손해… 수익성 악화에 '백기'
미국 밀 농가들은 가뭄이 들면 수확량이 줄어 울고, 풍년이 들면 가격이 떨어져 우는 악순환에 갇혔다. 2년 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미국 전체 밀밭의 3분의 1이 버려졌다. 지난해 캔자스주는 겨울밀 재배지의 93%가 가뭄에 시달렸고, 수확량은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올해는 작황이 좋아 2016년 이후 최고의 수확량이 기대됐지만, 지난 5월 밀 가격은 거꾸로 5년 만의 최저치로 곤두박질쳤다.

미국 농무부(USDA) 자료를 보면, 2020년 이후 해마다 겨울밀 경작지의 5분의 1에서 3분의 1이 수확을 포기한 채 버려졌다. 전국적으로 옥수수와 콩이 주요 작물로 자리를 굳힌 가운데 밀은 파종 면적에서 한참 뒤처진 3위에 머물러 있다.

수익 격차는 뚜렷하다. 최대 밀 생산지인 캔자스주는 2024년 밀 파종 면적이 옥수수보다 130만 에이커나 넓었지만, 생산액은 오히려 옥수수가 밀의 두 배를 웃돌았다. 러시아, 유럽 등지에서 값싼 밀 공급이 늘면서 미국산 밀의 경쟁력이 약화된 탓이다. 풍부한 세계 공급량 때문에 미국 기준 가격이 농가의 생산비를 밑돌기 때문이다.

네브래스카주 링컨에 있는 레이크프런트 퓨처스의 대린 페슬러 분석가는 "현재 가격은 농부들이 수익을 낼 수 없는 수준"이라며 "많은 농가가 자기 자본을 잠식하며 버티고 있지만, 은행은 수익을 증명하지 못하면 농장을 경매에 넘길 것이라고 압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개척의 역사' 품었지만… 경제 논리에 밀린 유산

미국 대평원에서 밀은 단순한 작물 이상의 뜻을 지닌다. 유명 찬송가 '아름다운 미국' 가사에 '호박색 곡물 물결'로 묘사했을 만큼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역사적으로 캔자스 정착민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노나이트 교도들이 '터키 레드 밀' 종자를 들여온 뒤에야 척박한 땅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이 밀은 건조한 토양과 혹독한 기후를 이겨내며 대평원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제 그 전통은 수익성 앞에서 힘을 잃고 있다. 비료, 연료, 인건비 같은 생산비는 급등해 수익성은 더욱 악화되고, 정부의 직접 지원금마저 축소되면서 농가들은 더욱 버티기 힘들어한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 윌라 캐더의 고향으로 유명한 네브래스카주 레드클라우드 주변에서는 이제 수 마일 안에 밀밭을 찾아보기 어렵다.

캔자스주 콜비에서 4만 에이커 규모의 '프람 팜랜드'를 운영하는 론 프람 최고경영자(CEO)의 농장은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농지 주변은 이제 밀밭 대신 풍력발전 단지가 차지했다. 프람 자신도 이제 주로 옥수수를 심는다. 그의 7000에이커에 이르는 밀밭이 농장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5%에 불과할 때도 있다.

프람 최고경영자는 "밀은 우리 농장의 유산이지만, 수익은 없다"면서 "옥수수에서는 확실히 수익이 난다"고 잘라 말했다.

물론 밀은 여전히 윤작을 통해 토양의 질을 보존하는 등 미국 농업 시스템에서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경제적 압박 때문에 점점 주변 작물에 밀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밀 생산 감소가 길게는 곡물 무역적자 확대, 식량안보 약화, 나아가 농촌 공동체 붕괴 같은 심각한 사회와 경제의 파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