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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미국, 관세 앞세워 동맹국에 안보·기업 특혜 '전방위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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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미국, 관세 앞세워 동맹국에 안보·기업 특혜 '전방위 요구'

한국에 "GDP 3.8% 국방비 증액, 주한미군 역할 변경 지지" 압박
중국 항만 통제권 포기·자국 기업 특혜 등 비관세 장벽 넘어 개입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미국이 관세를 앞세워 동맹국에 안보 부담과 자국 기업 특혜를 동시에 요구하는 등 무역을 외교·안보의 압박 수단으로 활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미국이 관세를 앞세워 동맹국에 안보 부담과 자국 기업 특혜를 동시에 요구하는 등 무역을 외교·안보의 압박 수단으로 활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진=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를 미국의 외교·안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방위 수단으로 활용해온 정황이 드러났다. 기존에 알려진 무역 적자 해소를 넘어, 동맹국에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고 기후 변화 정책에 개입하며 개별 기업에 특혜를 주는 등 광범위한 국가 안보 목표를 관철하는 핵심 지렛대로 사용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가 9일(현지시각) 입수한 미국 정부 내부 문건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 협상을 동맹국의 국방·외교 정책을 바꾸는 압박 카드로 쓰는 자세한 계획을 세웠다. 특히 한국에는 중국을 견제하고자 미군 역할을 변경하는 데 지지하고 방위비를 대폭 늘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들어있어 파장을 낳을 전망이다.

문건 속 한미 협정 초기 초안은 한국을 향한 미국의 노골적인 요구사항을 담고 있다. 미국은 싱가포르, 이스라엘 같은 다른 중국 인접국들과 함께 미군 주둔 확대, 미국산 방위장비 구매, 항만 방문 등 국방 협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의 하나로 한국에 이같이 요구한 것이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북한을 계속 억제하면서 중국을 더 잘 억제하기 위한 주한미군(USFK) 병력 태세의 유연성을 지지하는 정치 성명을 발표할 것"을 협상 목표로 못 박았다. 주한미군의 역할과 작전 반경을 대중국 견제용으로 넓히는 데 한국의 공개 지지를 얻어내려는 속셈으로 풀이된다.

국방비 증액 요구도 들어 있었다. 미국은 한국의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2.6%(2024년 기준)에서 3.8%까지 끌어올리고, 약 2만8500명인 주한미군 주둔 비용에 대한 한국의 분담금(해마다 10억 달러 이상)도 올리기를 원했다.
트럼프 대통령 자신도 지난 4월 2일, 이른바 '해방의 날(Liberation Day)' 연설에서 "우리는 전 세계 국가들의 군대를 위해 돈을 내준다"며 "조금 줄이려고 하면 그들은 화를 낸다"고 말해 동맹의 안보 무임승차론과 방위비 분담 증액 뜻을 공공연히 드러낸 바 있다.

◇ 中 영향력 차단·자국 기업 챙기기 '이중 포석'


내부 문건의 핵심 목표는 중국의 전략 영향력 억제에 맞춰졌다. 행정부는 동맹과 우방국의 핵심 기반 시설에서 중국의 존재감을 없애려 했다.

이스라엘에는 중국 국영 기업인 상하이 국제항만그룹의 하이파 항만 운영권을 없애라고 압박하는 동시에, 미국 에너지 기업 셰브론에 불리한 규제 조치를 멈추라고 요구했다. 호주에는 중국계 기업 랜드브리지 그룹이 99년간 운영하는 다윈항을 사실상 국유화하라는 '신호'를 보내라고 했다.

압박은 아프리카와 남미로도 뻗었다. 마다가스카르에는 중국군 주둔을 허락하지 말도록, 모리셔스에는 화웨이·ZTE·하이크비전 같은 중국산 통신장비를 퇴출하도록, 아르헨티나에는 자국 내 중국 우주 시설을 민간용으로만 쓰도록 보장하는 통제 조치를 요구했다.

심지어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레소토에는 일론 머스크의 스타링크가 주소를 제출할 의무를 풀어주고, 미국 신재생에너지 기업 원파워에 5년 동안 원천징수세를 면제하며 대규모 발전사업 허가를 내주라고 요구하는 등 특정 기업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대변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를 특정 현안 해결을 위한 압박 수단으로 전방위로 활용했다. 인도에는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멈추게 하려고 50% 관세로 위협했고, 콜롬비아에는 미국에서 추방된 이민자를 받아들이도록 관세를 써서 압박했다. 브라질을 상대로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쿠데타 혐의 기소를 멈추게 하려고 50% 관세 카드를 꺼내 들었다.

◇ "외교적 강압"…안보 우려에 동맹국 '속수무책'


이런 협상 방식은 행정부 내부에서조차 "전통 무역협정에서는 볼 수 없는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실제로 유럽연합(EU), 일본, 베트남과 일부 '기본 협정'을 발표했지만, 자세한 내용을 담은 공식 조문은 공개하지 않았다.

미 국무부 직원들조차 "이런 내용은 무역협상에서 전례 없는 일"이라며 충격을 나타냈다. 한편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나라가 미국의 관세 폭탄에 보복하지 못하는 까닭이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미군 철수나 나토(NATO) 탈퇴 같은 심각한 안보 보복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 국무부는 "유출된 문서를 두고 언급하지 않겠다"면서도 관세 정책이 미국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원론적인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실질 안보가 아닌 외교 '강압' 수단이며,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 모두에 해를 끼친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