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연준 흔들기'에 잭슨홀 총재들 "남 일 아니다"…독립성 훼손 '나쁜 선례' 될라 우려
볼커가 세운 '물가 안정' 40년 공든 탑 무너지나…달러 지위·금융시장 위협 현실로
볼커가 세운 '물가 안정' 40년 공든 탑 무너지나…달러 지위·금융시장 위협 현실로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을 자신의 뜻대로 재편하고 금리 인하를 거세게 압박하면서, 연준이 과연 독립성과 인플레이션 대응 능력을 지켜낼 수 있을지 근본적인 의문이 나온다. 리사 쿡 연준 이사의 사퇴를 압박하는 등 이사회 구성에 직접 개입하려는 시도는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의 분리 원칙마저 위협한다. 만약 연준이 정치 압력에 굴복하거나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 이사를 해임하는 선례를 만들면, 그 파장은 즉각 유럽과 일본 등으로 번져나갈 수 있다. 각국의 통화 정책 독립성이라는 기존 규범을 자국 정치인들이 새로운 공격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올리 렌 정책위원은 잭슨홀 현장에서 "정치 동기에서 비롯된 연준 공격은 유럽을 포함한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공감대 속에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연단에 서자 장내에서는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파월 의장이 금리 인하 가능성을 내비치기는 했으나, 이는 경제 약화 우려에 따른 판단이지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 때문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음에도, 동료 중앙은행가들은 그가 정치 외압에 맞서 꿋꿋이 버텨주기를 바라며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 '40년 공든 탑' 와르르…금융시장 혼란·달러 위상 추락 경고
연준의 굴복은 단순히 한 기관의 위기를 넘어, 40년 전 폴 볼커 전 의장이 고강도 긴축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은 이래 다져온 상대적 물가 안정 시대의 종언을 의미할 수 있다. 그간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은 정치로부터의 독립을 바탕으로 물가 안정이라는 단일 목표에 집중하는 연준 방식을 따라왔다. 분데스방크의 요아힘 나겔 총재는 "독립성은 당연한 것이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며 "우리는 책무를 이행하고, 독립성이야말로 물가 안정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물론 아직 시장은 연준의 독립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가격에 반영하지 않고 있다. 미국 증시는 호황이며, 국채 금리나 기대 인플레이션의 급등 같은 신뢰도 하락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2026년 5월 파월 의장의 임기 만료 후 후임자를 지명할 수는 있지만, 7명의 연준 이사회 과반을 장악하려면 추가 공석이 필요하다. 12개 지역 연은 총재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구조 역시 워싱턴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균형추 역할을 한다.
◇ 남의 일 아닌 각국 중앙은행…ECB·일본도 '독립성 수난사'
그러나 강력한 제도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에서조차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이토록 취약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른 나라에 더 큰 경각심을 일깨웠다. 유럽연합(EU) 조약으로 자율성을 보장받는 ECB조차 10년 전 대규모 채권 매입 당시 '정부 재정 지원'이라는 비판과 함께 여러 차례 법적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에서는 정당들이 주기적으로 ECB를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렸다. 중앙은행 총재 임명을 정쟁의 도구로 삼은 사례도 있다. 라트비아에서는 마르틴스 카작스 총재가 재임명 과정에서 정부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비판에 시달렸고, 슬로베니아는 정당 간 갈등으로 지난 1월부터 총재가 공석이다. 일본의 경우, 고(故) 아베 신조 총리가 디플레이션 대응이 미온적이라며 시라카와 마사아키 당시 총재를 압박했고, 그가 임기 전 사임하자 2013년 구로다 하루히코를 직접 낙점했다. 구로다 총재의 대규모 자산 매입은 성장 부양에는 기여했지만, 중앙은행이 자국 정부를 최대 채권자로 두는 이례적인 일을 낳으며 논란을 불렀다.
일본은행(BOJ)의 한 소식통은 "마치 트럼프가 아베에게서 배운 것 같다"고 현 상황을 촌평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인기영합주의 성향의 다른 정부들이 자국 중앙은행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부추길 수 있다. 파월 의장은 2026년 5월까지 임기를 보장받지만, 이후 이사회 구성 변화 가능성을 두고 긴장은 계속될 전망이다. 연준은 이사 선임 순서와 권한 분산으로 정치 압력에 저항하고 있으나, 법과 제도 보호 장치가 완벽하지 않아 독립성 유지가 쉽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모리 옵스펠드 전 수석 경제학자는 "연준 장악은 다른 정부들에게 매우 나쁜 선례를 남기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제도적 견제와 균형, 법치주의의 보루라던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다른 나라들이 더 쉬운 목표물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중앙은행 독립성은 물가 안정과 금융시장 신뢰 유지의 근간이며, 이를 위협하는 정치 압력은 세계 경제 안정성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 독립성 강화를 위한 제도 보완과 정치권의 존중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