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고율 관세에 4년간 2100만톤 증설…생산능력 25%↑
설비가동률 수익성 마지노선 붕괴…현대제철·포스코도 투자 부담
설비가동률 수익성 마지노선 붕괴…현대제철·포스코도 투자 부담

'미국 우선주의'가 자국 철강산업의 발목을 잡는 역설이 현실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 관세 정책이 촉발한 수십 년 만의 최대 제철소 건설 붐이 공급 과잉을 부추겨 업계의 수익성을 되레 위협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9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자동차와 건설 등 핵심 수요처의 부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친환경·고효율 전기로 설비만 빠르게 늘어나면서 수급 불균형이 심화하는 탓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산업 정책에서 제강업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는 지난 5월 US스틸 공장 연설에서 "강력한 철강 산업은 단지 존엄이나 번영, 자부심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국가 안보의 문제"라고 강조한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부터 수입 철강에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해 미국 제조업체들이 자국산 제품을 사용하도록 유도했다. 올해 6월부터는 세율을 50%로 두 배 올리며 보호무역 장벽을 한층 더 높였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미국 철강 가격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고, 자국 업체들은 수입품과의 경쟁에서 시장 점유율을 손쉽게 늘렸다. 그러나 높은 가격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자동차와 건설 등 주요 수요처의 부진이 관세 장벽 효과를 상쇄하며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미국철강협회(AISI)에 따르면 지난해 철강 출하량은 2015년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다. 전체 시장에서 수입품 비중만 줄었을 뿐, 총수요 자체가 10년 전 수준에 미치지 못한 탓이다. 이 때문에 올해 미국 철강 산업의 설비 가동률은 업계가 수익성 확보의 마지노선으로 여기는 85%에 한참 밑도는 76.6%에 머물고 있다.
◇ 수요 없는 증설 경쟁…수익성 '빨간불'
수요 부진에도 공급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시장조사업체 아거스 미디어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지난 4년간 미국에서 발표·착공·완공된 철강 생산 능력은 총 2100만 톤에 이른다. 이는 지난해 미국 전체 생산량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막대한 물량이다. 기존 설비에 신규 시설 가동까지 더해지면서 올해 누적 생산량은 5592만 톤으로 소폭 늘었지만, 이는 오히려 과잉 공급 우려를 키우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제철에 인수된 US스틸은 140억 달러를 투입해 새 제철소를 짓고 폐쇄 예정이던 피츠버그 공장 등을 현대화하기로 했다. 미국 최대 철강사인 뉴코어를 비롯해 스틸 다이내믹스, 아르셀로미탈 등도 앞다투어 생산 확장에 나섰다. 현대제철과 포스코 역시 미국산 현대차에 철강을 공급하고자 루이지애나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
◇ 관세 효과 '반짝'…가격 하락에 속수무책
예로부터 미국 철강 시장은 전체 수요의 최소 20%를 수입에 의존해왔다. 자국 업체들이 과잉 생산에 따른 손실을 피하려고 범용 제품 시장의 일부를 해외 업체에 내주었기 때문이다. 주요 공급국은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와 함께 한국이 포함된다. 컨설팅 회사 CRU의 조시 스푸어스 미주 철강 분석 책임자는 "제철소들이 수입을 잃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수입을 필요로 한다"고 분석했다.
관세 장벽 덕분에 미국 철강 가격은 한때 국제 시세보다 1톤에 400달러 이상 비싸게 유지됐다. 그러나 지난 6월 발효된 추가 관세로 가격이 잠시 오르기도 했을 뿐, 효과는 단기에 그쳤다. S&P 글로벌 커머디티 인사이트에 따르면 열연강판 현물 가격은 1톤에 약 820달러로 8월 초 이후 5% 내렸으며, 일부 제품은 800달러 선에서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 해결의 관건은 수요 회복에 달려있다. 제조업체들이 투자를 늘리거나 해외 공장을 미국으로 옮겨야(리쇼어링) 늘어난 공급을 소화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제조업체는 여전히 수요 부진에 시달리고 있으며, 확실한 수요처 없이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리쇼어링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공급 과잉이 길어지면 설비 유휴화와 수익성 악화가 겹치는 구조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일부 기업은 위기를 돌파하려고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사업 체질을 바꾸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워싱턴 스틸의 길모어 CEO는 철강 소비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려면 GDP 성장률이 꾸준히 2%를 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렇지 않다면 리쇼어링은 많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투자 수익을 얻기가 극도로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