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한·미 관세 협상, '직접 투자 vs 보증' 구조 놓고 아직은 평행선

글로벌이코노믹

한·미 관세 협상, '직접 투자 vs 보증' 구조 놓고 아직은 평행선

미국 2000억 달러 직접투자 요구, 한국 외환시장 영향 우려...10월 29일 정상회담이 분수령
실무협상 종료했지만 핵심 쟁점 여전히 미해결, 극적 타결 가능성도 남아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왼쪽)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2일 한·미 관세 협상 추가 논의를 위해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서 미국 워싱턴DC로 출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왼쪽)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2일 한·미 관세 협상 추가 논의를 위해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서 미국 워싱턴DC로 출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3일 워싱턴DC 협상을 마치고 귀국했다. 이들은 22일(현지 시각)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 2시간 회동을 끝으로 실무 협상을 마무리했으나 핵심 쟁점에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김용범 실장은 인천공항에서 "일부 진전은 있었지만 핵심 쟁점에 대해서는 양국의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황"이라며 "APEC을 계기로 한 타결을 기대한다면 갈 길이 멀다"고 밝혔다. 김 장관도 "직접투자 규모를 놓고 양국이 굉장히 대립하고 있다"며 협상 난항을 인정했다.

블룸버그는 지난 20일 "대부분 이슈에서 실질적 진전이 있었다"고 보도했으나 직접투자 비율과 투자 결정권, 통화스와프 구조 등 민감한 이슈들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날 "한국과 매우 공정한 거래를 이뤄냈다"고 발언했지만 구체적 합의안은 공개되지 않았다.

미국 "연 250억 달러씩 8년" vs 한국 "연 150억 달러씩 10년"


양국의 가장 큰 이견은 직접 현금투자 규모다. 미국은 일본의 5500억 달러 합의를 벤치마크로 제시하며 매년 250억 달러씩 8년간 총 2000억 달러의 직접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나머지 1500억 달러는 보증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한국은 매년 150억 달러씩 10년간 투자하되, 직접투자는 전체의 5% 이내(약 175억 달러)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보증 형태로 제공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한국 정부는 "과연 양국 이익에 부합하는가, 상업적 합리성이 있는가, 금융·외환 시장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가"를 3대 원칙으로 삼고 있다.

러트닉 장관은 9월 공개 발언에서 "한국은 거래를 받아들이거나 가파른 관세에 직면해야 한다"며 압박했다. 그는 7월 합의 발표 당시 X(옛 트위터)에 "수익의 90%는 미국인에게 돌아간다"고 밝혀 미국이 투자 결정권과 수익 배분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려 한다는 점을 시사했다.

외환위기 우려가 한국의 발목 잡아...원화 급락 시나리오 현실화 가능성


한국이 직접투자 비율을 낮추려는 이유는 명확하다. 3500억 달러는 한국 외환보유액(4163억 달러)의 84%에 이르는 천문학적 규모다. 한국은행은 연간 150억~200억 달러가 외환시장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최대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이 요구하는 연 250억 달러는 한은이 제시한 상한선(200억 달러)보다 50억 달러 많고, 하한선(150억 달러)과 비교하면 무려 100억 달러나 더 많은 금액이다. 한은 기준을 최소 25%에서 최대 67%까지 초과하는 셈이다.

원화 약세 심화와 정부의 고육책


2025년 트럼프 재선 이후 원화는 주요 통화 대비 지속적인 약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 엔은 달러 대비 3.71% 상승하고 유로가 7.66% 상승했지만, 원화는 0.37% 하락해 상대적 취약성을 드러냈다. 10월 23일 기준 원·달러 환율은 약 1440원으로, 6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정부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긴급 조치에 나섰다. 10월 중순 10억 달러 규모 5년 만기 미국 달러 표시 채권과 7억 달러 규모 엔화 표시 채권을 발행했다. 그러나 매 발행마다 국가부채가 증가하고, 이는 국가신용등급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더 큰 문제는 자금조달 방식이다. 일본은 기축통화국으로 달러 표시 채권 발행이 용이하지만, 한국은 원화 채권을 발행해 달러로 환전해야 한다. 금융업계는 "만약 대규모 현금투자가 요구되면 이 환전 과정이 원화 급락을 촉발할 수 있다"면서 "1997년 외환위기 당시와 유사한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의 경제적 차이를 지적한다. 일본의 순대외자산은 3.62조 달러로 한국(1.03조 달러)의 3.5배에 이른다. 또 일본은 연방준비제도(Fed)와 통화스와프 라인을 보유하고 있어 외환위기 시 안전망이 있지만, 한국은 이런 장치가 없다. 한국 정부는 재무부 외환안정기금(ESF)을 통한 제한적 통화스와프를 요청했으나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한국은행은 4월 기준금리를 동결하며 "원화가치 방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경기부양을 희생하는 선택으로, 2025년 1분기 GDP 성장률은 전년 대비 -0.1%로 역성장을 기록했다.

일본 모델, 겉과 속 달라..."실제 직접투자는 1~2%"


미국이 벤치마크로 제시한 일본 거래의 실상은 발표와 다르다. 일본 수석 협상가는 5500억 달러 중 실제 직접 지분 투자는 1~2%(55억~110억 달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일본국제협력은행(JBIC) 등을 통한 대출과 보증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9월 서명된 미·일 양해각서(MOU)는 트럼프가 프로젝트를 승인하면 일본이 45영업일 내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투자를 거부할 경우 배당금 박탈과 관세 인상 위험이 있어 사실상 직접투자와 유사한 효과를 낸다.

전문가들 "한미동맹, 안보 협력에서 경제 거래로 전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한국이 "유럽연합(EU)과 캐나다처럼 보복관세로 대응하지 않고 거래를 성사시키려고 가장 노력한 미국 무역 파트너"였지만 그 결과 "모든 레버리지를 양보했다"고 평가했다. CSIS의 빅터 차 한국석좌는 "미국 우선 정책이 동맹에 정상적 동맹 관례를 넘어서는 요구를 가한다"면서 "이는 동맹 유지 책임의 부담을 효과적으로 미국 파트너의 손에 넘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전문가들은 한국이 수출 1달러당 거의 무이자 자본 1달러를 제공하는 셈으로 미국이 위험한 투자를 선택해도 재정 위험은 한국이 부담하는 구조라고 비판한다. 특히 투자 결정권이 미국 대통령에게 있고, 수익의 90%가 미국으로 가는 구조는 "사실상 조공(朝貢) 외교"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트럼프의 관세정책이 "미국 및 글로벌 경제 성장을 크게 감소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증가시킨다"면서 "미국에 최대 피해를 주도록 설계됐다”고 평가했다. 한국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관세율이 0.79%에 불과한데 25% 관세에 직면했다는 점에서 "상호 관세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잘못 설계됐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전 USTR 부대표 웬디 커틀러의 말을 인용해 "이번 합의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면서 "FTA 파트너임에도 특별대우를 받지 못하는 한국의 처지"를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APEC 타결 가능성?...시나리오별 영향 분석


10월 31일~11월 1일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에 앞서 이재명-트럼프 양자회담(10월 29일)이 예정되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23일 CNN 인터뷰에서 "조정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며 APEC 타결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를 두고 시장에서는 3가지 타결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먼저, 프레임워크 합의 가능성이다. 전문가들은 구속력 없는 프레임워크 수준의 공동선언이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로 본다. "3500억 달러 투자 합의"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15% 관세 인하를 약속하되, 펀드 구조와 통화스와프 등 민감한 세부사항은 후속 협상으로 미루는 방식이다.

이 경우 즉각적 경제 불확실성은 제거되지만, 세부사항이 협상 요소로 남아 트럼프가 추가 요구를 위한 레버리지를 유지하게 된다. 자동차 관세가 15%로 인하되면 현대·기아는 일본·유럽 경쟁사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다. 반도체 역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TSMC와의 경쟁에서 숨통을 틔울 수 있다.

두 번째는 협상 결렬 또는 장기화다. 시장에서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가장 낮다고 본다.

통화스와프 구조 합의 실패나 트럼프의 전액 선지급 고집으로 협상이 결렬될 경우, 한국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한국은행이 5월 성장률 전망을 1.5%에서 0.8%로 하향 조정한 상황에서 25% 관세가 유지되면 성장률은 0.5% 이하로 추락할 수 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이 황폐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과 유럽 경쟁사는 15% 관세인 반면 한국은 25%로, 가격 경쟁력이 완전히 상실된다. 5월 현대·기아의 대미 수출이 27% 급감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제조업 전체의 영업이익률 5.6%는 실효 관세 부담으로 거의 소멸될 수 있다.

안보 불안도 커질 수 있다. 경제 위기가 안보 불안으로 이어져 한국의 비상계획 수립을 추동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CSIS는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통한 잠재적 핵무장 능력 확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중국과의 협력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부분 합의 후 재협상 가능성이다. APEC에서 프레임워크 합의를 발표하되 일부 관세만 인하하고 세부사항을 연기하는 절충안이다. 이는 양측의 체면을 살려주지만 "지속적인 성장 감소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CSIS는 "세부사항을 MOU로 미루면 양측에 정치적 승리를 선언할 여지를 주지만, 트럼프가 추가 요구를 위한 레버리지를 유지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마지막까지 우리 입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맹의 거래화, 한·미 관계 미래 좌우할 전망


이번 협상은 단순한 무역 분쟁을 넘어 한미동맹이 후견-피후견 관계에서 거래적 부담 분담으로 전환되는 역사적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향후 직접투자 비율, 투자 선정권, 수익 배분 등 핵심 쟁점의 해결 여부가 한·미 관계의 미래를 좌우할 전망이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도 연계될 가능성이 있다. 5월 보도된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부인됐으나 무역과 안보를 연계하는 트럼프의 의지를 보여준다. 유출된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GDP의 3.8%(약 750억 달러)를 방위비 분담금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제기됐다.

다만 1500억 달러 규모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는 한국 조선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HD현대와 한화오션은 미 해군 전력 증강에 핵심적이며, 8월 HD현대는 미 해군 군수함 유지·보수·정비(MRO) 계약을 수주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단기적으로는 프레임워크 합의를 수용하되 직접투자를 연 150억 달러로 제한하고, 재무부 ESF 스와프를 확보해 외환시장 안전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조선업 중심의 상업적 협력 확대와 한·일 협력 강화를 통해 미국의 개별 압박을 완화하고, 무역 다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