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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엔비디아 족쇄 채우지 마라" 백악관, 의회와 정면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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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엔비디아 족쇄 채우지 마라" 백악관, 의회와 정면충돌

'GAIN AI법' 저지 나선 트럼프 행정부…엔비디아 로비 통했다
의회 "대통령 못 믿겠다" 맞불…수출 통제권 박탈 'SAFE법' 추진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출 통제권을 둘러싼 백악관과 의회 간의 전례 없는 파워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백악관이 의회가 추진 중인 강력한 대중(對中) 반도체 제재 법안인 'GAIN AI법'에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 엔비디아(Nvidia)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사안으로, 국가 안보와 자국 산업 보호라는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며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의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20일(현지 시각)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백악관 고위 당국자들은 최근 의회 주요 의원들을 상대로 'GAIN AI법' 처리에 반대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이 법안은 엔비디아나 AMD 같은 미국 칩 기업들이 중국 등 적성국가나 무기 금수 대상국에 수출 통제된 AI 칩을 판매하려 할 때, 미국 기업에 '우선 공급권(first dibs)'을 의무적으로 부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美우선주의 의회 vs 엔비디아 편 선 백악관


'GAIN AI법'은 표면적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슬로건인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표방한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최신 칩을 먼저 확보하게 함으로써 중국의 기술 굴기를 억제하겠다는 논리다. 마이크로소프트(MS) 등 하이퍼스케일러(대규모 데이터센터 운용사)들은 이 법안을 지지해 왔다. 중국 경쟁사들의 칩 확보를 차단하는 동시에,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UAE) 등 해외 데이터센터로의 칩 반입 명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악관이 이 법안을 막아서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이는 명백한 엔비디아의 승리다. 엔비디아는 "미국 내 고객들은 칩 부족을 겪고 있지 않다"며 GAIN AI법이 불필요한 규제라고 끈질기게 로비해 왔다. 백악관의 이번 조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중국에 대한 칩 판매에 개방적일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백악관이 안보 논리보다는 미국 핵심 기업인 엔비디아의 수익성과 시장 지배력 유지에 힘을 실어준 셈이다.

"대통령 권한 뺏겠다"…의회 'SAFE법' 반격

백악관의 제동에 의회는 즉각 '플랜 B'를 가동하며 맞불을 놓았다. 바로 'SAFE법(Secure and Feasible Exports Act of 2025)'이다. 외신에 따르면, 크리스 쿤스(Chris Coons) 상원 의원 등이 주도하는 이 법안은 기존 GAIN AI법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강력하다.

SAFE법은 미 상무부가 현재 허용 기준(엔비디아의 중국 전용 칩 H20 수준)을 초과하는 모든 AI 칩에 대해 대중국 수출 승인 신청을 '의무적으로 거부'하도록 명문화했다. 주목할 점은 이 법안의 탄생 배경이다. 의회 내 대중 강경파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자의적인 수출 통제 완화 움직임에 깊은 불신을 갖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 측은 과거 금지했던 H20 칩의 중국 판매를 몇 달 만에 허용하면서 매출의 15%를 챙기는, 법적으로 모호한 거래를 승인한 전력이 있다. 게다가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을 앞두고 최신 '블랙웰(Blackwell)' 칩의 저사양 버전을 중국에 팔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자, 의회 내 안보 매파들은 경악했다.
SAFE법은 이러한 대통령의 '변덕'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의회의 의지다. 행정부의 재량에 맡기던 수출 승인 권한을 법률로 강제하여, 대통령조차 마음대로 중국에 칩을 팔 수 없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무어의 법칙'도 옛말…30개월 시한부 규제


SAFE법에는 특이한 조항이 있다. 바로 법안의 효력이 '30개월' 동안만 유지된다는 점이다. 이는 입법 기술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반도체 기술, 특히 AI 하드웨어의 발전 속도는 과거 '무어의 법칙(18~24개월마다 칩 성능이 2배 향상)'을 훨씬 상회한다. 스콧 베선트(Scott Bessent) 미 재무장관은 최근 CNBC 인터뷰에서 "블랙웰 칩이 성능 면에서 2~4단계 뒤처지는 12~24개월 후에는 중국 판매가 가능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SAFE법의 30개월 일몰 조항은 이러한 기술 발전의 주기를 반영한 것이다. 오픈AI가 챗GPT를 내놓은 지 불과 3년 만에 산업 지형이 천지개벽한 상황에서, 영구적인 규제란 불가능하다는 의회의 현실 인식이 깔려 있다.

엔비디아 '산 넘어 산'…첩첩산중 中시장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백악관의 도움으로 급한 불(GAIN AI법)은 껐을지 모르나, 앞날은 여전히 시계제로다. 젠슨 황 CEO는 20일 블룸버그 TV 인터뷰에서 "중국 매출 전망은 제로(0)"라고 못 박으면서도 "훌륭한 제품으로 중국 시장과 다시 연결되길 간절히 원한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시진핑 정부 역시 자국 기업들에게 "미국이 허용한 엔비디아 칩(H20 등)조차 쓰지 말라"고 압박하며 탈(脫)미국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여기에 미 의회가 SAFE법을 통해 수출 통제의 빗장을 아예 용접하려 하고 있어, 엔비디아의 중국 시장 재진입은 사실상 요원해 보인다.

현재 GAIN AI법과 SAFE법의 운명은 결정되지 않았다. 의회는 국방수권법안(NDAA)에 관련 내용을 포함할지 저울질 중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반도체 수출 통제라는 '국가 안보의 영역'을 두고, 행정부의 '비즈니스적 접근'과 의회의 '원칙론적 접근'이 정면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싸움의 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지도는 또다시 요동칠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