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 2달러·약값 1500% 인하 공언에도 美 민심 "현실 부정 말라" 싸늘
'제2의 바이든노믹스' 딜레마…고금리·킹달러 장기화되면 韓 기업 실적 '경고음'
'제2의 바이든노믹스' 딜레마…고금리·킹달러 장기화되면 韓 기업 실적 '경고음'
이미지 확대보기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6일(현지시각) '트럼프가 미국인들에게 지불능력 문제를 무시하도록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정치의 법칙을 거스르던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경제적 현실과 마주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 정책이 과거 조 바이든 행정부가 겪었던 '인플레이션 덫'에 빠져들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가는 사기극" 현실 부정하는 대통령 vs 지갑을 닫는 유권자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연설에서 현재 갤런당 3달러(약 4400원) 수준인 휘발유 가격이 2달러(약 2900원)까지 폭락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또한, 관세 수익으로 국민에게 2000달러(약 295만 원)의 환급 수표를 지급하고, 머지않은 미래에 소득세를 완전히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심지어 약값이 1500%나 떨어지고 있다며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전망은 싸늘한 여론과 충돌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ABC뉴스-입소스가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의 경제 직무 수행에 대한 부정 평가는 62%에 달한 반면, 긍정 평가는 37%에 그쳤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고물가 고통을 호소하는 유권자의 목소리를 "민주당의 사기(con job)"라고 일축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공화당 원로인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우리가 지불능력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공화당원은 미국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라며 "자유 국가에서 무엇이 진짜인지 정의하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라고 지적했다.
치명적 약점이 된 물가... 바이든의 악몽 재현되나
정치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바이든 전 대통령을 괴롭혔던 것과 똑같은 딜레마에 빠졌다고 분석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이 인플레이션을 "일시적"이라거나 "푸틴의 가격 인상" 탓으로 돌리며 '바이든노믹스'의 성과를 강변하다가 유권자의 외면을 받았듯, 트럼프 역시 경제 지표와 체감 경기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낸 재러드 번스타인은 "트럼프는 종종 지지자들을 대안적 현실로 이끄는 데 능하지만, 가격 문제만큼은 그에게 '크립토나이트(슈퍼맨의 약점)'와 같다"며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조차 가격이 오르는지 내리는지는 정확히 알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경제 지표는 불안한 조짐을 보인다. 지난 10월 발표된 미국 물가상승률은 연 3%로 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휘발유와 달걀 가격은 다소 안정됐지만, 주거비, 의료비, 교육비 등 수십 년간 누적된 구조적 비용 상승은 여전히 미국 가계를 짓누르고 있다.
공화당 내 퍼지는 위기감... "이대로면 중간선거 필패"
공화당 내부에서는 고물가 역풍으로 내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참패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선거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달 치러진 선거에서 민주당이 버지니아와 뉴저지 주지사 선거를 휩쓸었고, 공화당 강세 지역인 테네시주 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 후보의 득표율 격차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공화당 여론조사기관 '시그널'의 브렌트 뷰캐넌 최고경영자(CEO)는 "백악관이 일관되고 공감하는 메시지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물가가 괜찮으니 불평하지 말라고 가르치려 들면, 유권자들은 대통령이 자신의 걱정거리에 관심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고 분석했다.
더글러스 엘멘도르프 전 의회예산국(CBO) 국장은 트럼프의 경제 정책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글로벌 관세를 부과하고, 의료 보조금 확대에 반대하며, 연방준비제도(Fed)에 금리 인하 압박을 가하는 것은 물가를 잡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데자뷔' 경제학... 바이든 탓으로 돌리기 급급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 방식은 전임 정부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J.D. 밴스 부통령은 최근 내각 회의에서 "오늘날 미국인이 겪는 모든 위기는 조 바이든과 의회 민주당이 야기한 문제"라며 책임을 전가했다.
마이클 스트레인 미국기업연구소(AEI) 경제정책연구소장은 이를 두고 "섬뜩하다(eerie)"고 표현했다. 그는 "트럼프는 바이든의 인플레이션 대응 실패 덕분에 당선됐는데, 지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며 "기업 탓을 하고, 문제를 부인하며, 높은 고용률만 자랑하는 모습은 '기이하다'는 말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지적했다.
美 '좀처럼 꺾이지 않는 고물가', 한국 경제에 던지는 경고장
미국의 고물가 기조가 꺾이지 않는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 인상과 금리 인하 압박이라는 모순된 정책을 고집할 경우, 한국 경제에 상당한 파장이 닥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 고환율·고금리 장기화 위험이다. 미국의 물가 오름세가 잡히지 않으면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금리 인하 시점을 늦출 공산이 크다. 제롬 파월 의장의 후임으로 금리 인하를 선호하는 인사가 내년 5월 이후 취임하더라도, 인플레이션이 계속된다면 무리하게 금리를 내리기 어렵다. 만약 내년 하반기까지 고금리가 이어진다면, 한국은행의 금리 운용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는 가계부채 부담이 큰 한국 내수 경기에 악재가 된다. 특히 '킹달러(달러 초강세)' 현상이 지속되면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의 제조 원가 부담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둘째, 주요 수출 기업의 실적 불확실성 확대다. 가장 큰 타격이 우려되는 곳은 소비재 기업이다. 미국 소비자들이 고물가 여파로 지갑을 닫을 경우,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기업의 수주 물량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바로 실적 둔화로 직결된다. 자동차 업계도 안심할 수 없다. 고금리가 유지되면 미국의 할부 금융 금리도 떨어지지 않아 현대차·기아의 신차 구매 수요가 위축될 수 있다. 그나마 방산 분야는 정부 간 계약(G2G) 성격이 강해 직접적인 타격은 덜하겠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재정 지출 축소를 명분으로 동맹국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더 거세게 요구할 빌미가 될 수 있다.
셋째, 통상 압력 가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물가 안정을 위해 수입품 가격 인하를 유도하기보다, 세수 확보를 위한 '보편적 관세' 카드를 고집한다면 한국의 대미 수출 경쟁력은 약화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와 기업이 미국의 인플레이션 데이터를 단순한 남의 나라 소식이 아닌, 2026년 수출 전략과 자금 조달 계획을 수정해야 할 핵심 변수로 인식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