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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ASML, '구형 장비'라며 中 군수기업에 수출…"양자 패권 도왔다"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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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ASML, '구형 장비'라며 中 군수기업에 수출…"양자 패권 도왔다" 논란

'첨단 기술 아니다' 항변했지만…로켓·드론 만드는 中 국영기업에 장비 공급 확인
네덜란드 정보국 경고 무시하고 양자 연구소에도 수출…'수출 통제 구멍' 우려 증폭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이 중국의 군사 및 양자 기술 관련 기업에 DUV 장비를 판매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해당 기술이 중국의 군사력 증강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사진=오픈AI의 챗GPT-5.1이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이 중국의 군사 및 양자 기술 관련 기업에 DUV 장비를 판매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해당 기술이 중국의 군사력 증강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사진=오픈AI의 챗GPT-5.1이 생성한 이미지

세계 유일의 최첨단 반도체 노광장비 생산 기업인 네덜란드 ASML이 중국의 군사 및 양자 기술 개발에 연루된 기업들에게 장비를 판매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10일(현지 시각) IT 전문 매체 톰스 하드웨어(Tom’s Hardware)와 네덜란드 공영방송(NOS)에 따르면 ASML 측은 해당 장비가 수출 통제 대상이 아닌 '구형 기술(old technology)'이라고 해명했으나, 이 기술이 중국의 군사력 증강과 차세대 양자 컴퓨터 개발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中 군사 복합체의 심장부로 흘러간 ASML 장비


이번 논란의 핵심은 ASML의 거래 상대방이 중국의 안보 위협과 직결된 조직들이라는 점이다. 보도에 따르면 ASML은 중국전자과학기술그룹(CETC)의 자회사에 반도체 제조 부품을 판매했다. CETC는 중국의 대표적인 국영 기업으로, 로켓 시스템과 드론용 핵심 장비를 생산하는 중국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기업은 중국 우주 프로그램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며, 군용 반도체를 제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ASML이 '심자외선(DUV) 노광 시스템' 완제품을 '선전 국제양자아카데미(Shenzhen International Quantum Academy)'에 공급했다는 의혹이다. 이는 네덜란드 군사정보보안국(MIVD)이 중국의 양자 기술 개발에 대해 명시적으로 경고해온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보다. 양자 컴퓨팅 기술은 기존 암호 체계를 무력화하고 군사 시뮬레이션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게임 체인저'로 꼽힌다. ASML의 장비가 이러한 중국의 기술 굴기에 결과적으로 일조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38나노 구형이라 괜찮다"?…안보 불감증 논란


ASML은 즉각 방어막을 쳤다. 회사 측은 고객사와의 구체적인 거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을 거부하면서도, 중국에 이전된 기술은 최첨단과는 거리가 멀다고 선을 그었다. ASML이 공급한 DUV 장비는 약 38나노미터(nm) 해상도의 칩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는 구형 모델이라는 것이다. 현재 최신 극자외선(EUV) 시스템이 8나노 이하의 초미세 공정을 구현하는 것과 비교하면 기술적 격차가 크다는 논리다.

ASML 대변인은 "중국 칩 제조업체가 수출 통제 대상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ASML 같은 공급업체의 몫이 아니다"라며 "국가 안보는 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해당 장비는 최첨단 칩 생산에 사용될 수 없는 낡은 기술"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기업 입장에서 법적인 테두리 내의 수출 규제만을 준수했을 뿐, 최종 사용자가 해당 기술을 어떻게 군사적으로 전용(dual-use)할지까지 검증할 의무는 없다는 항변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분석가들의 시각은 다르다. 비록 최첨단 8나노 칩은 아닐지라도, 38나노급 칩 역시 미사일 유도 장치, 드론 제어 시스템, 그리고 초기 단계의 양자 컴퓨터 프로세서 등 군사·안보용으로 충분히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형 기술'이라는 프레임이 중국의 군사 기술 고도화를 돕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부품 수출'의 사각지대…규제 실효성 도마 위

이번 사태는 서방 세계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망에 뚫린 '구멍'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네덜란드 외무부는 NOS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하이테크 상품이 정의상 민감하거나 수출 통제 허가 대상인 것은 아니다"라며 "노광 장비 부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장비 구동에 필요한 수많은 부품 중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부품은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현장 전문가들의 진단은 정부의 안일한 인식과 배치된다. 랜드(RAND) 유럽의 중국 전문가이자 전 다테나(Datenna) 수석 연구원인 주디스 휴이스만스(Judith Huismans)는 "문제는 네덜란드 정부가 이러한 부품 수출에 대해 어떠한 통제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NOS가 접촉한 업계 전문가들 역시 중국 기업에 판매된 부품들이 실제로는 특정 제조 장비 가동에 필수적인 핵심 요소였으며, 마땅히 수출 통제 대상에 포함되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휴이스만스 연구원은 "부품에 대해서도 수출 통제를 고려해야 한다"며 "이는 ASML이 중국에 아무것도 수출하지 못하게 막자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더 많은 통제권과 도구를 갖게 하자는 취지"라고 제언했다. 현재의 느슨한 부품 수출 규제가 중국의 '기술 자립'과 '군사 현대화'를 돕는 우회로로 악용되고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총성 없는 기술 전쟁, 기업의 도덕적 해이?


네덜란드 정부는 중국의 칩 설계 소프트웨어 및 제조 하드웨어 접근이 초래할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다. 최근 네덜란드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Nexperia)와 중국 자본의 연루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ASML의 경우, 그 거래 규모와 기술적 중요도가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구형 기술'이라는 명분 아래 규제의 칼날을 피해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ASML의 이번 거래는 단순한 비즈니스를 넘어,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최전선에서 서방 기업들이 겪는 딜레마와 도덕적 해이를 동시에 보여준다. '오래된 기술'이 적국의 '새로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기존의 수출 통제 기준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Editor’s Note]


기술의 '이중 용도(Dual-use)' 문제는 언제나 수출 통제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찌릅니다. ASML의 주장처럼 38나노 공정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와 같은 최신 칩 제조에는 턱없이 부족한 구식 기술입니다. 하지만 미사일 제어, 레이더 시스템, 그리고 초기 양자 컴퓨팅 연구에는 차고 넘치는 사양입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고 정부는 안보를 걱정하는 사이, 그 틈새를 파고든 '구형 기술'들이 중국의 '군사 굴기'라는 퍼즐을 완성하는 조각으로 쓰이고 있는 셈입니다. 이번 논란은 단순히 장비 하나를 팔고 안 팔고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안보'의 정의를 어디까지 확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