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유럽의 착각과 2026년의 오판 : 상호의존은 더 이상 방패가 아니다… ‘결합 위기’의 중심에 선 한국, 도덕 대신 ‘힘의 전략’을 설계하라
이미지 확대보기세계는 지금 평화에서 전쟁으로 단번에 이동하고 있지 않다. 전쟁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 평화의 언어로 포장된 채, 점진적으로 열려 왔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반대다.
'제국(Empire)'이라는 저작으로 유명한 미 스탠퍼드 후버연구소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이 최근 발생한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압송이나 중국의 대만 포위 군사훈련 같은 사태들과 관련해 서구 매체를 통해 던지는 경고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는 제3차 세계대전이 어느 날 갑자기 선언과 함께 폭발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이미 전쟁으로 향하는 구조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문제는 발생 여부가 아니라 시점과 방식이라고 강조한다.
니얼 퍼거슨이 말하는 전쟁의 전조: 역사는 언제나 방심 속에서 무너졌다
퍼거슨이 보기에 오늘날 세계가 위험한 이유는 전쟁 준비가 아니라 전쟁 회피에 대한 과도한 낙관 때문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을 자주 언급한다. 당시 유럽의 엘리트들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너무 깊어 전면전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금융과 무역, 기술 협력이 전쟁을 억제할 것이라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상호의존이 무너질 때의 충격은 전쟁을 더욱 빠르고 격렬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의 세계 역시 비슷한 착각 속에 있다. 글로벌 공급망과 금융 시스템, 기술 생태계가 너무 깊이 얽혀 있기 때문에 주요 강대국 간 전면 충돌은 비합리적이라는 믿음이 여전히 강하다. 퍼거슨은 이 믿음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착각이라고 본다. 상호의존은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는 상호의존이 무기로 전환되며, 그 전환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현재의 국제질서가 다극화로 안정되는 것이 아니라, 양극화된 긴장 속에서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대 세력이 충돌하는 구조에서, 지역 분쟁과 주변국의 계산은 더욱 위험해진다. 작은 사건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통제 불능 상태로 확산될 가능성이 커진다.
퍼거슨의 분석에서 중요한 부분은 미중 경쟁이 과거 냉전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냉전은 비교적 안정된 규칙 속에서 관리된 경쟁이었다. 직접 충돌을 피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작동했고, 영향권 역시 비교적 명확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중 경쟁은 훨씬 더 불규칙하고, 훨씬 더 많은 접점을 가진다.
군사적 충돌만이 전쟁의 전부가 아니다. 기술 통제, 금융 제재, 정보전, 공급망 차단, 우주와 사이버 영역의 충돌이 동시에 전개된다. 퍼거슨은 이것이 바로 현대적 의미의 세계대전 양상이라고 본다. 전면적인 핵전쟁이 아니라, 여러 전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분산된 충돌이 장기화되는 형태다.
이런 구조에서는 전쟁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다. 어느 순간을 전쟁의 개시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바로 이 점이 세계를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아직 전쟁이 아니라고 믿는 사이,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퍼거슨은 특히 미국과 중국이 모두 자국의 상대적 쇠퇴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을 위험 요소로 본다. 역사적으로 패권국과 도전국이 동시에 불안해질 때, 충돌 가능성은 급격히 높아졌다. 상대를 억제하려는 행동이 오히려 상대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그 불안이 다시 강경한 대응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형성된다.
영향권 정치의 부활과 세계 질서의 재편: 규칙의 시대에서 힘의 시대로
퍼거슨의 경고는 단순히 미중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오늘날 국제질서 전체가 규칙 중심에서 영향권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흐름이다. 강대국들은 다시 공간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그 공간에서의 행동 자유를 확보하려 한다.
이러한 변화는 베네수엘라, 중동, 동유럽, 대만 해협 등에서 동시에 관측된다. 각각의 지역은 분리된 위기처럼 보이지만, 퍼거슨은 이 모든 사례를 하나의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강대국들은 더 이상 규칙을 통해 질서를 관리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힘을 사용해 질서를 재편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동맹의 의미도 달라진다. 동맹은 더 이상 절대적인 보호막이 아니다. 동맹은 거래의 대상이 되고, 상황에 따라 부담을 전가받는 구조로 변한다. 특히 중견국과 동맹국들이 이 변화를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퍼거슨의 지적이다.
한국이 서 있는 위치: 위기의 교차로에 놓인 국가
퍼거슨의 분석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하면, 그 의미는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한국은 미중 경쟁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미중 경쟁의 모든 요소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는 것이다.
대만 해협의 긴장, 한반도의 군사적 불안정,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서로 분리된 문제가 아니다. 어느 하나의 위기가 고조될 경우, 나머지 위기들이 연쇄적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크다. 퍼거슨이 말하는 세계대전의 위험은 바로 이런 결합 위기에서 현실화된다.
한국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상황을 관리 가능한 위기로 오인하는 것이다. 평시의 논리로 위기를 해석하고, 과거의 질서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순간, 선택지는 급격히 줄어든다. 퍼거슨은 역사적으로 이런 순간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들이 중간에 위치한 국가들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한국의 전략적 선택: 퍼거슨의 경고가 요구하는 현실주의
퍼거슨의 경고는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낙관을 버리라는 요구라고 봐야 한다. 한국에게 그의 경고는 세 가지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동맹을 신성시하지 말고 구조화해야 한다. 동맹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절차의 문제다. 위기 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구조가 없다면, 동맹은 선언에 머무른다.
둘째, 자강은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다. 이는 고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맹 안에서 협상력을 갖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이다. 스스로 선택지를 가진 국가는 강대국에게도 함부로 다뤄지지 않는다.
셋째, 경제와 안보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퍼거슨이 지적하듯, 현대의 전쟁은 금융과 기술, 공급망에서 이미 시작된다. 경제 전략은 곧 안보 전략이라는 것이다.
전쟁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그러나 준비는 늘 늦게 시작된다
니얼 퍼거슨의 글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되고, 방치되고, 오해된 끝에 폭발한다. 지금 세계는 그 준비 단계의 후반부에 들어서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게 필요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대비다. 퍼거슨의 경고를 비관으로 치부할 수도 있고, 과장으로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장 위험한 선택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세계가 다시 힘으로 관리되는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퍼거슨의 평가가 맞다면, 한국은 그 변화의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퍼거슨의 경고가 한국에 던지는 가장 냉정하고도 실천적인 메시지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