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사이에 끼인 유럽…관세·공급망 압박 속 ‘하나의 권력’ 선택 기로
방위·산업·외교 분절 땐 각개격파…“시장 아닌 진짜 힘이 돼야 가치 지킨다”
방위·산업·외교 분절 땐 각개격파…“시장 아닌 진짜 힘이 돼야 가치 지킨다”
이미지 확대보기지난 2010년대 8년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지낸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가 유럽연합(EU)이 지금의 구조를 유지할 경우 탈산업화와 분열, 국제 질서에서의 종속을 동시에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유럽이 단순한 공동 시장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연방 국가로 나아가야 할 기로에 서 있다고 강조했다.
프랑스의 다국어 뉴스 채널인 유로뉴스는 지난 2월 2일 ‘드라기는 EU가 탈산업화와 쇠퇴를 피하기 위해 ‘진정한 연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라는 제하의 보도를 통해, 드라기가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받으며 한 연설에서 이 같은 주장을 펼쳤다고 전했다.
붕괴된 세계 질서와 유럽의 위기
드라기는 현재의 국제 질서를 “이미 기능을 상실한 체제”로 규정했다. 그는 그 출발점으로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과, 서방 국가들이 독자적인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와 교역을 확대하기 시작한 시점을 지목했다. 이 과정이 오늘날 나타난 정치적 반작용과 무역 축소, 규범 약화를 초래했으며, 그 자체는 고통스럽지만 결정적인 위협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가 보기에 진짜 위협은 그 이후에 등장한 환경이다. 드라기는 미국이 유럽에 관세를 부과하고, 유럽의 영토적 이해관계를 위협하며, 유럽의 정치적 분열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중국은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고리를 통제하며 시장에 물량을 쏟아내거나 필수 투입재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인 유럽
드라기는 미국이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지배력을 결합하려는 전략을 쓰고 있고, 중국은 자국의 성장 모델에서 발생한 부담을 외부로 전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환경에서 유럽이 지금과 같은 느슨한 결속 상태를 유지한다면, 개별 국가들이 각개격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단순히 여러 소국이 모여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강력한 블록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권력은 구조와 제도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유럽이 미·중 경쟁의 압박 속에서 선택을 미룰수록, 전략적 공간은 더욱 좁아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연방화된 영역과 분절된 영역의 차이
드라기는 유럽이 이미 연방화에 가까운 형태로 운영하고 있는 분야에서는 국제사회에서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역 정책과 경쟁 정책, 단일 시장, 통화 정책에서는 유럽이 하나의 행위자로 존중받으며 협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인도와 중남미 국가들과 체결한 무역 협정을 그는 그 사례로 들었다.
반면 방위와 산업 정책, 외교 분야에서는 각국이 개별 계산과 거부권을 유지하고 있어, 유럽이 느슨한 중견국들의 집합체로 취급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유럽은 분열되고, 외부 세력에 의해 순차적으로 압박받는 구조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실용적 연방주의’와 선택의 시간
드라기는 자신이 제안하는 모델을 ‘실용적 연방주의’라고 설명했다. 이는 모든 국가를 강제로 통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통의 목적을 공유하는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조다. 그는 유로화 도입 과정을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들며, 일부 국가가 먼저 시작하고 이후 다른 국가들이 합류했던 경험을 상기시켰다.
그는 유럽이 선택해야 할 질문은 명확하다고 강조했다. 유럽이 다른 강대국들의 우선순위에 좌우되는 거대한 시장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권력으로서 스스로의 이익을 방어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기는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없는 유럽은 오래도록 자신의 가치를 지킬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