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공포에 서두른 원전 폐쇄, 14년 만에 '에너지 청구서'로 돌아왔다
JP모건, 원전 유지 시나리오 정밀 분석…가스 발전 의존·제조업 경쟁력 추락 직격
메르츠 총리 "세계에서 가장 비싼 에너지 전환" 자인…유럽 전역 정책 재평가 급물살
JP모건, 원전 유지 시나리오 정밀 분석…가스 발전 의존·제조업 경쟁력 추락 직격
메르츠 총리 "세계에서 가장 비싼 에너지 전환" 자인…유럽 전역 정책 재평가 급물살
이미지 확대보기독일 루르 지역 한 중견 철강업체 관계자가 최근 유럽 언론에 털어놓은 말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독일 정부는 공황에 가까운 속도로 탈원전 정책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결정의 대가가 전기요금 폭등·제조업 이탈·에너지 수입 급증이라는 삼중 청구서로 날아들고 있다. JP모건이 지난 3일 발표한 제16차 연례 에너지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다.
이미지 확대보기JP모건 "원전 유지했다면 전기요금 25% 낮았다"
JP모건 자산운용의 마이클 젬발레스트(Michael Cembalest) 시장·투자전략 의장은 아이 온 더 마켓(Eye on the Market)' 제16차 연례 에너지 보고서에서 독일의 현 상황을 '핵 후회(Nuclear Regret)'라는 표현으로 요약했다. 보고서는 '원전 폐쇄가 없었다면'이라는 가상 시나리오를 설정해 구체적 수치를 산출했다.
분석에 따르면, 독일이 2011년 이후에도 기존 원전을 계속 가동했을 경우 화석연료 기반 전력 생산량은 현재보다 약 50%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수입 천연가스 의존 발전량은 84%나 감소했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설비 용량 측면에서도 화석연료 시설은 27%, 천연가스 설비는 42% 덜 필요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독일 소비자와 기업이 실제로 감당한 전기요금은 원전을 유지했을 때보다 2024년 기준 약 25% 더 높은 수준이라고 보고서는 밝혔다.
같은 맥락에서 PwC(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가 독일 상황을 별도 분석한 결과도 주목된다. PwC에 따르면 2010년 당시 원전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을 경우, 2024년 독일 평균 전력 도매가는 실제보다 약 23%(MWh당 18유로) 낮았을 것으로 나타났다. 두 기관의 분석 방법론은 다르지만, "탈원전이 전기요금을 끌어올렸다"는 결론은 일치한다.
젬발레스트 의장은 "독일의 전력 수입량이 10년 전 대비 두 배에 달한다"며 에너지 자립도 추락을 함께 지적했다.
미·중보다 2~3배 비싼 전기료…"탈산업화 도미노"
비싼 에너지 비용은 독일 경제의 기둥인 제조업에 직격탄을 날렸다. JP모건 보고서는 독일 산업용 전력 가격이 미국이나 중국보다 현저히 높다고 지적했다. 유럽 전체로 넓혀봐도 EU 주요국의 중공업 전력 단가는 미국 대비 약 2배, 중국 대비 약 1.5배 수준이라는 국제에너지기구(IEA) 등의 분석이 나와 있다. 독일은 이 가운데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용 전기요금 국가로 꼽힌다.
에너지 경제 전문가인 다니엘 스텔터(Daniel Stelter)는 "재생에너지와 가스발전의 조합이 저렴한 전기를 만들어낼 것이라 믿는 이들은 환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이라며 "태양광·풍력의 비용만 계산하면 저렴해 보이지만, 저장장치와 배터리 등 시스템 비용까지 포함하면 재생에너지는 가장 비싼 선택지"라고 지적했다.
메르츠 현 총리 "스스로 상황을 비싸게 만든 나라"
독일 정치권도 자성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25년 5월 취임한 프리드리히 메르츠(Friedrich Merz) 총리는 "우리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에너지 전환을 진행하고 있다"며 "독일만큼 스스로 상황을 비싸고 어렵게 만드는 나라를 나는 알지 못한다"고 정책적 실책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메르츠 총리는 2025년 5월 EU 기후 정책에서 원자력을 재생에너지와 동등하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독일의 입장을 선회시켰다. 14년 만의 공식적인 원자력 재평가다.
그러나 이미 폐쇄된 원전의 재가동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래디언트 에너지 그룹(Radiant Energy Group)의 연구를 인용한 JP모건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이 가동을 멈춘 원자로를 다시 돌리는 데는 기존 설비 상태와 규제 절차에 따라 기당 수억 달러에서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가동 중단 기간이 길어질수록 재가동 비용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구조다. 독일 내부에서조차 재가동 대신 소형모듈원전(SMR)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 에너지 정책에 드리운 그림자
독일의 실패는 한국에 낯설지 않은 거울이다. 한국 역시 전임 정부 시절 탈원전 정책을 공식화한 경험이 있다. 당시 신규 원전 건설 중단과 가동 원전 수명 연장 불허 방침이 발표됐고, 에너지 믹스의 급격한 재편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후 정권 교체와 함께 원전 정책이 다시 우호적 방향으로 전환됐지만, 에너지 정책의 급격한 변동이 전력 수급과 산업 비용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한국도 자유롭지 않다.
특히 반도체·배터리·철강 등 에너지 집약 산업이 국가 수출의 핵심 축을 이루는 한국 입장에서, "산업용 전기요금이 경쟁국 대비 2~3배 높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독일은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에너지 업계 한 관계자는 "독일의 사례는 에너지 전환 속도와 산업 경쟁력 사이의 균형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라고 말했다.
월가의 경고…"에너지 정책이 국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금융권과 에너지 업계는 독일의 사례가 유럽 전역의 에너지 정책 재평가를 촉발하는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탈탄소 목표 아래 원전을 배제했던 국가들이 에너지 안보와 요금 안정이라는 현실 앞에서 다시 원자력으로 눈을 돌리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블룸버그(Bloomberg)는 지난해 12월 "독일이 새로운 가스 발전 사업마저 유럽연합(EU)의 규제 장벽에 막히며 전력 공급 공백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력 수요는 전기차·산업 전동화로 늘어나는데, 공급 선택지는 점점 좁아지는 구조적 딜레마다.
한때 유럽 경제의 엔진으로 불리던 독일이 에너지 비용이라는 족쇄에 발이 묶인 채 경기 침체의 긴 터널을 헤매고 있다. 월가가 독일의 탈원전을 "세계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정책 실험"으로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에너지 선택은 수십 년의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독일의 청구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