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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발 공급 쇼크, 반도체·식량 안보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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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발 공급 쇼크, 반도체·식량 안보 흔든다

중동 전쟁과 중국 수출 통제 겹치며 '화학의 왕' 가격 폭등
글로벌 공급망 마비에 구리·비료 생산 차질… 한국 산업계도 비상
비료 창고의 중국 노동자들. 사진=연합뉴스 이미지 확대보기
비료 창고의 중국 노동자들. 사진=연합뉴스
지난 9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이란 전쟁으로 인한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중국의 전략적 수출 제한이 맞물리면서 '산업의 비타민'으로 불리는 황산 공급망에 전례 없는 비상이 걸렸다.

농업(비료)부터 첨단 산업(반도체·배터리)까지 실핏줄처럼 연결된 황산 수급이 꼬이면서 세계 경제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한층 가중되는 양상이다.

호르무즈 봉쇄가 촉발한 '화학의 쌀' 품귀 현상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에너지 시장을 넘어 기초 소재 산업 전반을 강타하고 있다. 페르시아만 일대 석유 정제 시설에서 부산물로 생산되는 유황은 전 세계 황산 원료의 핵심축을 담당한다.

하지만 최근 미·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군사 충돌로 호르무즈 해협이 폐쇄되면서 유황 공급길이 완전히 차단됐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순한 가격 상승을 넘어 공급망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금속 가공 스타트업 '발로(Valor)'의 쿠날 신하(Kunal Sinha) 최고경영자(CEO)는 WSJ와의 인터뷰에서 "황산은 부식성이 강해 장기 저장이 불가능한 품목"이라며 "대부분의 기업이 한 달치 미만의 재고만 보유하고 있어 해협 봉쇄와 같은 돌발 변수에 매우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구리 최대 생산국인 칠레의 황산 가격은 전쟁 발발 이후 2배 이상 폭등했다. 유황 가격 조사 기관 아구스(Argus)에 따르면, 중동산 유황에 의존하는 인도네시아 역시 가격이 80% 이상 치솟으며 전기차 배터리용 니켈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중국, '식량 안보' 명분으로 수출 빗장 걸어


세계 최대 유황 생산국인 중국의 행보도 시장의 공포를 키우고 있다. 중국 정부는 자국 내 비료 가격 안정과 식량 안보를 이유로 이달 초부터 황산 및 원료 유황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를 단행했다.
황산 시장 분석업체 어큐리티 커모디티(Acuity Commodities)의 프리다 고든(Freda Gordon) 이사는 "중국 당국은 비료 가격 급등이 농가 부담과 식량 위기로 번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며 "수출 통제가 강화되면서 칠레와 인도네시아 등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고 분석했다.

황산은 비료 제조뿐만 아니라 반도체 웨이퍼 세정, 배터리 핵심 광물인 니켈·리튬 추출, 수돗물 정수 등에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이 때문에 중국의 공급망 무기화가 계속될 경우 첨단 IT 산업 전반으로 피해가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산업계 영향과 전문가 전망


한국 역시 황산 수급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고순도 황산은 미세공정에서 대체 불가능한 소재"라며 "수입선 다변화와 재고 관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일부 구리 제련 업체들은 이번 사태를 수익 개선의 기회로 삼고 있다. 아이반호 마인즈(Ivanhoe Mines)의 로버트 프리들랜드(Robert Friedland) 회장은 최근 실적 발표에서 "콩고민주공화국에 세운 구리 제련소에서 생산되는 황산 판매로만 하루 100만 달러(약 13억 6550만 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언급했다.

설퍼 인스티튜트(The Sulphur Institute)의 크레이그 요르겐슨(Craig Jorgenson) CEO는 "전 세계적으로 재고가 고갈되는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다"며 "주요 광물과 농산물 생산이 둔화되면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월가 분석가들은 해외 발 황산 부족 사태가 구리 가격을 사상 최고치로 끌어올리며 가전, 자동차, 데이터 센터 건설 비용 상승을 유발하는 '도미노 인플레이션'의 불씨가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