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만명 지원해 286명 채용…AOL·에버노트 되살리는 초정밀 인재 선발
이미지 확대보기미국의 명문사학 하버드대 입학보다 들어가기 어려운 회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이목을 끌고 있다. AOL, 에버노트, 비메오를 보유한 이탈리아 IT기업 벤딩스푼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탈리아 밀라노에 본사를 둔 벤딩스푼스가 지난해 80만명의 입사 지원자 가운데 286명만 채용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11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합격률은 0.04%에도 못 미친다. 미국 아이비리그 최상위권 대학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벤딩스푼스의 루카 페라리 최고경영자는 “회사의 채용 방식을 내부까지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좋은 의미에서 그렇게 보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벤딩스푼스는 최근 나스닥에 상장한 기업으로 이름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회사는 실리콘밸리가 아닌 밀라노에서 출발했지만 AOL, 에버노트, 비메오처럼 한때 유명했고 지금도 수많은 이용자가 쓰는 소프트웨어 브랜드를 사들여 다시 고치는 방식으로 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 지원자 80만명 중 286명만 채용
벤딩스푼스의 채용 규모는 숫자만 놓고 보면 세계 초일류 기업처럼 보인다. 지난해 이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지원한 사람이 80만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채용자는 286명에 그쳤다. 무려 99.9% 이상이 탈락한 셈이다.
WSJ에 따르면 벤딩스푼스는 최근 몇 년 사이 지원자가 급증했다. 연간 지원자 수는 11만명에서 36만명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80만명까지 불어났다.
첫 심사를 통과한 지원자는 약 6만명이었다. 이들은 추론 능력과 판단력, 학습 속도를 측정하는 여러 시험을 거쳤다. 그 결과 면접 대상자는 3300명으로 줄었다. 이후 정교한 평가와 참고인 확인, 내부 검토를 거쳐 최종적으로 286명만 입사했다.
◇ 면접도 알고리즘으로 점수화
WSJ에 따르면 벤딩스푼스가 채용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 회사의 사업 방식과 관련이 크다.
이 회사는 유명하지만 성장세가 둔화한 소프트웨어 회사를 사들인 뒤 내부 인력으로 코드와 인프라, 사용자환경을 다시 짠다. 사들인 회사를 단기간에 팔아치우기보다 고쳐서 오래 보유하고, 여기서 생긴 이익으로 다시 다른 회사를 인수한다.
이 모델이 돌아가려면 적은 인력으로 낡은 제품을 빠르게 뜯어고칠 수 있어야 한다. 벤딩스푼스가 채용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높은 기준을 적용하는 배경이다.
페라리 CEO는 “평범한 면접은 동전 던지기처럼 예측력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사람을 제대로 뽑기 위해 벤딩스푼스는 면접을 최대한 과학적으로 만들었다.
질문은 정밀하게 설계된다. 답변은 정해진 기준에 따라 채점된다. 정성적 요소도 수치화해 채용 알고리즘에 반영한다. 평가 점수가 모이고 참고인 확인과 의사결정 검토가 끝나면 후보자는 거의 남지 않는다.
벤딩스푼스 내부에는 다른 직원을 평가하고 새 인재를 선발하는 일만 맡는 조직도 있다. 이 조직에는 데이터 과학자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AI 연구자가 포함돼 있으며 채용과 해고에 최종 영향력을 갖는다.
◇ 예의까지 평가하는 채용 모델
벤딩스푼스의 채용 모델은 지원자의 실력만 보지 않는다.
이 회사는 후보자가 얼마나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지도 신호로 본다. 페라리 CEO는 “후보자가 임원에게는 대체로 공손하고 시간을 잘 지키지만 권한이 작은 직원에게 무례하게 대한다면 동료를 어떻게 대할지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행동도 모델에 들어간다. 하나의 신호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수백 개 신호를 합치면 입사 뒤 성과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이 회사의 판단이다.
벤딩스푼스는 면접 질문을 계속 바꾸고 시험 방식을 실험한다. 입사 뒤 4개월, 8개월, 1년, 2년이 지난 시점의 성과도 추적해 채용 때의 예측과 비교한다. 채용 모델 자체를 계속 검증하고 다시 조정하는 방식이다.
◇ 실패한 앱에서 시작한 인수 제국
벤딩스푼스도 처음부터 성공 기업은 아니었다.
페라리와 공동창업자들은 2010년 배낭여행을 다녀온 친구 사이였다. 이들은 이후 AI 기반 일기 앱을 만들었지만 제품은 시장에서 반응을 얻지 못했다. 회사는 자금난에 몰렸고 결국 청산됐다.
창업자들은 남은 4만달러(약 6000만원)로 새 회사를 세웠다. 실패를 복기한 뒤 얻은 결론은 두 가지였다. 사업을 시작할 때는 운이 중요하지만 사업을 운영할 때는 운의 영향이 줄어든다는 판단이었다.
이들은 이미 사람들이 원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제품을 사들이기로 했다. 운에 기대 새 제품을 띄우기보다 기존 이용자 기반이 있는 회사를 인수해 운영 능력으로 가치를 높이겠다는 전략이었다.
그 결과 벤딩스푼스 포트폴리오에는 AOL, 에버노트, 비메오처럼 한때 전성기를 누렸고 지금도 이용자가 남아 있는 브랜드가 들어왔다. 회사는 이를 사들여 고치고 장기 보유하는 방식으로 몸집을 키웠다.
◇ 인수 뒤 대규모 개편 논란도
벤딩스푼스의 방식은 성과와 논란을 동시에 낳았다.
회사가 기업을 인수하면 가장 먼저 큰 폭의 구조조정이 뒤따른다. 기존 직원 상당수를 줄이고 엄격한 선발 절차를 거친 벤딩스푼스의 핵심 인력이 제품과 기술을 다시 정비한다.
현재 벤딩스푼스에는 까다로운 채용 절차를 통과한 약 700명이 기술, 제품, 성장 부문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한 인수 기업에서 다른 인수 기업으로 이동하며 코드 재작성, 인프라 재구축, 사용자환경 개편 같은 깊은 변화를 수행한다.
직원 상당수는 20~30대다. 일부는 자신들이 맡아 되살리는 브랜드보다 더 젊다. 회사 임원진도 30대와 40대 초반이 중심이다.
페라리 CEO는 “경력 초기에 매우 뛰어나고 동기부여가 강한 사람을 알아보고 이들에게 높은 책임과 코칭을 제공하는 것이 회사의 핵심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 인재 선발이 사업 모델의 핵심
WSJ에 따르면 벤딩스푼스의 채용 방식은 단순한 인사 제도가 아니다. 이 회사의 인수 전략을 떠받치는 핵심 장치다.
낡은 소프트웨어 브랜드를 사들여 다시 성장시키려면 제품을 빠르게 이해하고 고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하다. 벤딩스푼스는 이를 대규모 인력 투입이 아니라 소수 정예 조직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 때문에 채용 과정은 회사의 투자 심사만큼 엄격하다. 어떤 기업을 살지 따지는 것만큼 어떤 사람을 들일지도 데이터와 모델로 판단한다.
벤딩스푼스가 보유한 브랜드는 오래됐지만 이를 운영하는 조직은 매우 젊고 작다. 낡은 인터넷 자산을 젊은 기술 인력과 AI 기반 운영 방식으로 다시 설계하는 것이 이 회사의 성장 공식이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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