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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큰 여성 거상 財쌓고 德 베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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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큰 여성 거상 財쌓고 德 베풀다

[존경받는 천상부자] ①조선 여성 CEO 김만덕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5월 중 제주에서 열리는 전문직여성세계연맹(BPW 인터내셔널) 총회의 상징은 김만덕이다. 3多(다), 3無(무)의 섬 제주도에는 ‘삼기’(三奇)도 있다. 제주에서 태어난 특이한 존재 세 명으로 고려 때 스님 혜일, 어승마(御乘馬)가 된 말 노정, 그리고 김만덕이다. 제주인들에게 ‘의녀반수 김만덕’은 흠모의 대상이다. 친숙하게는 '만덕 할망'이라 부르는 그의 기념관이 건립되는 과정이 현지 언론의 주요 뉴스로 오르내릴 만큼 흠모 열기가 높다.


조선 정조 대의 유명인사다. 12살에 조실부모해 기생의 몸종으로 들어갔다가 그 수양딸이 된다. 한때 기생으로 유명했다. 타고난 미모와 정결한 몸가짐, 뛰어난 기예로 관가의 크고 작은 연회는 그녀의 참석 여부에 따라 격이 좌우될 정도였다. 그 기예에 매혹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23살 때 깨달은 바가 있어 관가에 호소해 기녀 신분에서 벗어난다. 모아뒀던 돈으로 주막을 겸한 객주집을 차렸다.
명기 만덕이 객주집을 차렸다는 소문에 객주에 사람들이 모였고 상인들로부터 배운 유통과 상품 지식을 발판으로 대상인으로 거듭난다. 제주 특산물을 서울에 팔거나 양반층 부녀자들에게 옷감·장신구·화장품 등을 공급해 큰 부자가 된다. 그래도 본인은 늘 근검과 절약으로 일관했다. 가난한 제주 사람들을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빈자와 약자들을 돌봐주며 사랑으로 대해 존경받았으며 50세쯤 되자 육지 부자들과도 견줄만한 대부호가 돼 있었다.

전국적 유명인사가 된 것은 1792년(정조 16년)부터 4년간 계속된 제주의 흉년이 계기였다. 조정의 구휼미마저 풍랑에 침몰해 도민들이 아사 위기에 처했다. 만덕에게 이때부터 재산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었다. 그때까지 모은 1천금을 내놓고 육지에서 양곡을 사왔다. 육지에서 들여온 양곡에서 10분의 1은 친척과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관청에 구호곡으로 보냈다.

백성들 사이에서 만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임금 귀에까지 들어갔다. 운 좋게도 당시 임금은 인조나 선조 같은 속좁은 부류나 연산군이나 세조 같은 폭군이 아닌, 개혁군주 정조였다. 사람을 보내 만덕의 노고를 치하하고 소원을 물었더니 이 당돌한 할망구는 비대면 접촉임에 용기를 얻었는지 ‘궁궐 방문’과 ‘금강산 유람’을 청한다. 당시 제주도 여자는 육지에 나가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는데 임금에게 당돌하게 탈법을 요구한 것이다. 여성은 육지에 갈 수 없다는 규제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선 600년사의 남달랐던 임금 정조는 내의원 ‘醫女班首’라는 명예직이자 여성으로서는 최고 벼슬을 제수하고 평민 신분의 그녀를 입궐시킨다. 벼슬 한 자리를 원했어도 당연히 받아들여졌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뜻밖에 금강산 여행을 청한다. 이 또한 정조의 껄껄 웃음 속에 당연히 수용됐고 그녀가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의 모든 관공서가 편의를 제공하게 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칭송했고 당대 유명 인사들이 그녀를 찾았으니 가히 슈퍼스타였다.


많은 문인들의 글감이 되기도 했다. 학자 이가환은 만덕에게 시를 헌정했다. 정조의 탕평책을 앞서 시행한 채제공은 <만덕전>이라는 전기를 써서 바쳤다. 여기에는 만덕이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제주도로 향하면서 체제공을 향한 사모의 정을 나타냈다는 일화가 나온다. 그 자찬(自讚)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한 당찬 여성의 일면으로도 읽힌다. 정약용은 김만덕의 시권에 발문을 써주면서 만덕에게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 즉 ‘삼기사희’(三奇四稀)가 있다고 했다. 기생이 과부로 남아 수절한 것, 기꺼이 많은 돈을 희사한 것, 섬에 살며 산을 좋아한 것이 三奇이고 여자로 겹눈동자를 가졌으며 천민 신분으로 역말을 타고 왕의 부름을 받았고 기생으로 승려를 시켜 가마를 메게 했으며 섬사람으로 내전(內殿)의 사랑을 받은 것을 四稀라고 했다.

1840년(현종 6년) 제주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세상에 퍼진다)라는 글을 남겼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남은 재산도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눠주고 양아들에겐 그저 근근히 살아갈 만큼의 재산만 남겨줬다.
여자라는 사실 자체가 천형이었던 남근(男根) 중심 사회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었던 용기가 대단하다. 게다가 기생에, 극복된 신분조차 평민에 섬 출신이라는 사실도 콤플렉스였지만 한없이 큰 그녀의 꿈과 비전 앞에서는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고 불가피하게 기생이 되어 그 길에서 성공했으나 정작 남은 가족들은 창피하다며 그녀를 멀리했다. 그러나 그런 가족을 원망하지 않고 기근에 처한 가족을 구하고 그들과 화해했다. 시대와 불화하지 않고 당차고 창의적으로 경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정조에게 그녀는 당쟁으로 국력을 소진해온 정치권을 일신하겠다는, 개혁을 뒷받침해줄 아이콘이었다. 경직된 신분사회에서 국가를 위한 진정한 서번트 리더십을 발휘한 모범적 표상이다. 만덕이 정조라는 개혁군주, 애민군주가 아닌 다른 군주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채제공 같은 정치인 조력자가 없었더라면 그녀의 삶이 어떠했을까 하는 불온한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