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풍전등화 조국 위해 '반일친러'의 길을 가다

공유
0

풍전등화 조국 위해 '반일친러'의 길을 가다

[존경받는 천상부자]④보부상 출신 정치인 이용익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그 시대에는(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정경유착 없이는 보통 부자는 몰라도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백규, 호설암 같은 중국 거상들도 그렇고 김만덕이나 임상옥 같은 우리나라 부자들도 마찬가지다. 유력 정치인이나 관료의 음양의 도움이 거상의 전제 조건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후대에 그냥 부자가 아닌 존경받는 부자로 꼽힌 것은 그 속에 남다른 애민정신과 애국심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석현(石峴) 이용익(李容翊)도 그런 사람이다. 그에게는 많은 오해가 따라다닌다. 누차 독립협회로부터 국고금을 착복했다는 탄핵을 받았고 사망 당시 남긴 33만원(현재 가치 약 300억원)의 예금을 두고 그를 탐관오리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는 친러파이자 숙적인 그를 두고 “고종에게 유일무이의 충신이었고 개인적 욕심 때문에 돈을 탐하는 일이 없는 매우 질소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용익이 살던 당시 대한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문벌 귀족 및 척족으로 구성된 무력하고 탐욕으로 가득찬 대신들이 외세의 앞잡이가 되어가는데 충격을 받은 고종은 출신은 미천해도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을 중용한다. 이 중 끝까지 고종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두각을 나타낸 이가 이용익이다. 이용익은 국력 강화보다는 외세, 특히 주로 일본을 등에 업고 난국을 돌파하려 했던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일본을 경계하고 군사력 증강과 국외 중립을 통해 국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 보부상으로 돈모아 금광투자로 거부로


그는 이미 큰 부자였다. 185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보부상과 물장수 등으로 전국을 다녔다. 보부상으로 모은 돈으로 금광에 투자해 부를 쌓았다. 그를 아예 친일파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친일파들은 ‘친러파’인 그를 무척 견제했다. ‘친일과 반공’으로 이어진 우리 굴절된 우리 근현대사가 그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한성에 올라와 당시 세력자이자 민비(명성왕후)의 조카인 민영익의 집에 기거한다. 1882년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권력투쟁을 벌이던 민비가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하자 충주와 서울을 하루에 주파하면서 민씨 일족과 왕비 사이의 비밀연락책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당연히 민씨 일가, 특히 민영익의 큰 신임이 뒤따른다.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압송되고 민비가 환궁하면서 민영익의 천거로 종9품 감역이 된다. 이후 단천 감역으로 금광을 관리하면서 금맥 찾는 재주를 인정받고 왕실 재정을 키운 공로로 고종의 신임까지 얻어 단천부사로 특진한다. 1887년 영흥부사와 함남병마절도사로 임명됐으며 왕실 재정을 거의 도맡는다. 1888년 임지였던 북청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탐관오리로 탄핵받아 유배되기도 하지만 계속 묶여있기에는 재주가 워낙 비상했다.

곧 풀려나 재등용된다. 명문 세족이 아니면서도 강직한 성품에 이재에 밝고 정치적 식견도 탁월한 그를 고종도 신임한다. 그는 외세를 이겨내려면 나라, 즉 황실이 부유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02년 탁지부 대신이 되어 개정 화폐조례에 따라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동화를 대량 발주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황실 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인삼을 황실 전매사업화하고 외국인의 광산채굴 금지 및 광산관리 강화를 시행한다. 전국에 흩어진 국가 소유 토지 역토(驛土)와 둔토(屯土) 등을 내장원에 귀속시키고 봉세관을 파견해 세금 징수를 강화했다. 모범양잠소를 설치해 근대적 견직술을 강습하게 했으며 각 도에 공업전습소를 설치해 염직·직조업·제지업·금은세공·목공의 근대 기술자 양성을 시도했다. 서울에 사기제조회사와 총포공장을 건립했고 철도 부설, 근대금융기관 설립 등도 적극 지원,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개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풍전등화 조국을 위해 선택한 친러의 길로 평생을 가다!


일관성있게 친러반일적 입장을 고수해 일본 자본을 막고 대한제국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시도한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을 설득해 대한제국의 중립을 선언토록 한 것도 그였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러시아와 단교하고 1904년 외무대신 이지용을 내세워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 반대하는 이용익을 일본은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간다. 온갖 회유를 거절하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이듬해 귀국했다. 군부대신에 기용되지만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자 일제의 압력으로 사퇴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권이 박탈되고 보호정치가 실시되자, 프랑스·러시아 세력과 제휴를 꾀하라는 고종황제의 밀령을 받고 육군 부장 직명으로 프랑스로 향했다. 1906년6월 풍랑으로 중국 산둥성 옌타이항에 잠시 머물렀다가 현지 일본관헌에게 발각되고 책임 추궁을 염려한 대한제국 정부는 그의 권한을 박탈한다. 파리로 가 구국활동을 펼쳤으나 여의치 않자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로 가기 직전 친일 세력이 파견한 자객 김현토 등의 총을 맞고 중상을 입는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요양하는 한편 구국운동을 계속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1907년 2월 사망한다.

그가 생을 마감한 후 그의 정적이자 그를 모함했던 친일파 상당수가 일본의 강제합병에 공헌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재물을 받았는데 이용익 가문은 일제에 의해 오히려 재산과 직위를 몰수당했다. 그가 젊을 때 모아둔 재산(경성은행 예금액만 현재 가치로 330억원에 달했다. 손자인 독립운동가 이종호가 되찾으려 했지만 매국노 송병준의 방해로 실패했다)은 그의 죽음과 함께 한줌 재로 사라졌지만 외세에 맞선 보부상 출신 정치인이자 부호였던 이용익의 이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