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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아내 반지 팔아서라도 첨단 공장 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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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아내 반지 팔아서라도 첨단 공장 짓겠다”

4일 22주기, 한국 철강산업 역사에 큰획
국내 최초 고로‧전기로 제강설비 도입 등
설비 투자 통한 사업 발전에 평생 바쳐
아르셀로 미탈 회장 ‘와이즈맨’ 칭송받아

동국제강 TQC경진대회에 참관한 장상태 회장. 그는 '서슴없이 개혁해야 한다'면서 기업 전 부문의 경영혁신을 늘 강조했다. 사진=동국제강이미지 확대보기
동국제강 TQC경진대회에 참관한 장상태 회장. 그는 '서슴없이 개혁해야 한다'면서 기업 전 부문의 경영혁신을 늘 강조했다. 사진=동국제강
서울대학교 농과대학를 졸업한 청년 장상태는 부흥부의 관리가 되었다. 국민의 90%가 농민이던 시절이었다. 농민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손을 벌리고 도움을 청했다. 가난했던 정부는 예산도, 아이디어도 없어 보였다. 높은 사람 얼굴만 쳐다보는 일상이 그를 지치게 했다.

그 와중에 하늘에서 동아줄 같은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미국 유학생을 선발이었다. 기간은 2년, 미국 유학이란 꿈꾸기도 쉽지 않았던 6.25전쟁 직후의 일이었다. 패기만만했던 장상태는 시험에 합격했다. 결혼한 지 1년 남짓 되던 1956년 장상태는 어린 아내를 놔두고 미국으로 떠났다.
장상태는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면서 밤에는 식당에서 접시닦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는 것이 싫었다.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미국의 정치경제 문화에 이르기까지 대여섯 개나 되는 신문을 구매해서 샅샅이 읽었다. 광고란까지 읽으면서 신문의 행간을 통해 남다른 지식과 지혜를 얻어냈다.

후에 그가 동국제강을 경영하면서 철강 전문지와 뉴욕타임즈, 위싱턴포스트지, 그리고 피터드러커의 21세기의 기업경영이란 시리즈를 탐독한 습관은 이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장상태는 유학을 마치고 1년간 부흥부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1956년 동국제강에 전무로 입사했다. 사실 그는 호텔을 경영하고 싶었다. “사내가 남의 이부자리나 깔아 줘서야 되겠냐”는 아버지의 핀잔을 듣고 난후 생각을 접었다.

고로제철소 건설은 국책사업으로 해야
동국제강의 모태공장은 서울 영등포 당산동 공장과 부산 남구 용호동 공장이다. 이곳에서 젊은 장상태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막걸리를 주고 받으면서 진지하게 제철소 건설 계획을 논의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부산 용호동 공장을 순방한 후 공장 근무자들의 숙직실에서 약 2시간 동안 낮잠을 자고 갔을 만큼 장상태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박 대통령은 장상태에게 고로(용광로) 제철소를 직접 건설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장상태는 브리핑을 통해 국책 사업으로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정중히 거절했다.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이 국내 최초로 인천제강소에 도입한 100t 직류전기로에 들러 생산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동국제강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이 국내 최초로 인천제강소에 도입한 100t 직류전기로에 들러 생산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동국제강
당시 고로제철소 부지를 찾기 위해 10만 분의1 지도를 휴대하고 전국의 지리를 파악했던 자료와 대통령에게 브리핑했던 선진국 철강회사들의 경영자료 등은 동갑이며 절친이었던 박태준 포항제철(현 포스코) 사장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박태준 명예회장과는 오랫동안 한국의 철강 산업을 함께 개척해나간 동지였다. 그가 국무총리를 지내고 야인으로 돌아가 미국에 거주했을 때 장상태는 그를 잊지 않고 “이렇게 누추하게 살면 되겠느냐“면서 그를 조용히 지원했다.

장상태는 국가 통수권자로부터 군수 산업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살생을 하는 전쟁 무기의 생산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했던 일화도 있다.

과감한 선진 기술의 도입

장상태는 37세에 동국제강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인재 영입을 가장 중요시했다. 유능하고 경륜이 풍부한 인재들에게 직접 일을 맡기고 그 자신은 후선에서 큰 원칙만 챙겼다. 이때 그는 동국제강을 모기업으로 7개 철강 기업을 자회사로 거느린 철강 전문그룹으로 성장시켰다. 한국강업과 한국철강 그리고 연합철강 등은 인수 후 정상화시켰다.

 장상태 회장은 예고없이 공장을 방문해 직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자주 가져다. 부산제강소 생산부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동국제강이미지 확대보기
장상태 회장은 예고없이 공장을 방문해 직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자주 가져다. 부산제강소 생산부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동국제강


장상태는 동국제강을 경영하면서 선진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국내 첫 용광로의 도입과 전기로 제강기술의 도입, 그리고 고로 메이커의 전유물이었던 후판공장을 포스코보다 1년 앞서 준공 시켰다.

1970년대에 동국제강 후판공장은 연산 15만t 규모였으나 1990년대에는 30만t 체제로 증대시켰다. 이 후판공장은 2후판공장과 당진의 후판공장을 연이어 설립하는 단초를 제공하면서 한국을 세계 1위의 조선강국으로 성장시키는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혁신 일으켜 위기 극복


그는 어려운 시기가 닥치기 전에 혁신을 일으켰다. “리더는 위기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대처해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당시 전 세계 최고 경쟁력을 자랑하던 일본 철강산업을 추월해야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평지풍파를 일으켜서라도 혁신하라”는 지시를 전 사업장에 내렸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이 팀장급 이상 간부사원들을 소집해 각 개인의 의견과 대처방안을 토의하고 있다. 사진=동국제강이미지 확대보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이 팀장급 이상 간부사원들을 소집해 각 개인의 의견과 대처방안을 토의하고 있다. 사진=동국제강

혁신의 핵심은 스피드 경영이었다. 도장이 10여개나 찍혀야 하는 고질적인 결재과정을 단숨에 쓸어냈다. 그가 낸 아이디어는 직접 품의를 써서 집행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1994년 봄, 일명 ‘일 줄이기 캠페인’을 벌였다. 불필요한 일을 없애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철강산업은 공장에서 경쟁력이 나온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심장부였던 회장실과 기획개발부까지 근무처를 아예 인천공장으로 이전시켰다. 사원들의 마인드가 달라졌다. 관리직 사원들도 출근하자마자 “어제 인천공장과 부산공장의 제강생산량이 얼마나 되느냐?”고 질문할 정도였다.

포항에 주력공장을 건설하다


주력 생산지였던 부산공장이 주거지역으로 전환되자 1991년도부터 공장을 포항으로 이전시키면서 그는 기관차처럼 돌진했다. 인천공장에는 직류전기로 공장을 새로 건립하고, 포항공장에는 제2의 창업이라고 할 만큼 2개의 철강공장을 동시에 신설했다.

1997년 장상태 회장(가운데)이 포항제강소 건설현장을 방문한 모습. 그는 자주 공사현장을 방문하는 열정을 보였다. 사진=동국제강이미지 확대보기
1997년 장상태 회장(가운데)이 포항제강소 건설현장을 방문한 모습. 그는 자주 공사현장을 방문하는 열정을 보였다. 사진=동국제강

장상태 회장은 1997년 포항공장에 1조원을 투입했다. 30여만평의 포항 철강공단 부지에 제2후판공장과 형강공장, 봉강공장을 차례로 건설하는 도중에 국제통확기금(IMF) 외환위기가 도래했다. 국가경제는 초긴장 상태였다. 동국제강도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부산제강소 폐쇄에 따른 부지와 설비 매각대금을 투입하여 IMF의 폭풍을 비켜나갔다. 장상태 회장의 혜안이 다시 한번 빛나는 순간이었다.

포항공장을 건설하면서 장상태 회장이 보여준 태도는 ‘한평생 최고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철인(哲人)’으로 대변된다. 그는 철강공장의 첨단화를 위해 늘 고심했다.

을지로 입구에 있던 본사 사옥(현재 페럼타워 신축)은 3층 규모의 초라한 건물이었다. 왜 빌딩을 짓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 돈 있으면 첨단의 철강 공장을 더 짓겠다”고 할 만큼 장상태 회장은 공장 건설을 우선시했다.

그는 포항공장을 건설 할 때 설비가 시원치 않으면 가장 좋은 설비로 교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돈이 부족하다면 “아내의 반지를 팔아서라도 최첨단 설비를 갖추겠다”고 공언했다.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이 되기까지 다른 사업에 한눈 팔지 않겠다.”

“단돈 100만원만 있어도 설비에 투자 하겠다.”

이 일화들은 동국제강이 위기에 닥칠 때마다 꿋꿋이 이겨내었던 송원 장상태 정신을 일깨워 준다.

지혜를 앞세운 경영자

“그는 진정한 와이즈 맨(Wise Man)이었다.”

세계 최고의 철강그룹 아르셀로미탈 그룹의 오너인 ‘락시미 미탈’ 회장이 장상태 회장을 가리켜 한 말이다. 1990년대 중반, 장상태 회장은 후판 설비 구입을 위해 멀리 멕시코로 출장을 떠났다.

멕시코 이멕사에 장착하다 중단한 연산 150만t의 후판 설비는 중고이기는 하지만 새것과 다름없었다. 장상태 회장은 중역들에게 “이것이 2후판 설비로 적격이다”는 지시를 눈빛으로 내렸다. 꼭 사야 한다는 의미였다.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이 브라질 CST와 슬래브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사진=동국제강 이미지 확대보기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이 브라질 CST와 슬래브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사진=동국제강

30여 년 동안 철강 불모지에서 굴지의 철강기업으로 성장 시킨 백전노장 장상태 회장은 30대 수출입상 락시미 미탈에게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 락시미 미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즈니스는 팽팽히 당겨진 줄과 같았다.

미탈은 장상태 회장 일행이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과 2후판 설비 증축 계획까지 낱낱이 꿰고 있었다. 그는 가격 네고에 응하지 않았다. 동행한 동국제강 임원들은 몸이 달았다. 협상이 진척되지 않자 장상태 회장은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면서 한마디 했다.

“철강재는 글로벌 제품이다. 철강 설비는 필요한 사람에게 적정한 가격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래야 값싸고 품질 좋은 철강재를 산출하게 되고, 그것이 진정한 철강인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것으로 협상은 끝났다는 의미를 미탈에게 무겁게 전달했다.

서너 시간이 지난 이후에 미탈은 장상태 회장이 묵고 있는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많은 생각을 했다. 당신의 판단이 옳았다. 물건을 팔겠다.” 락시미 미탈은 장상태 회장이 건넨 말속에서 이익만 추구하는 비즈니스보다 꼭 필요한 곳에 철강 설비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철강인의 진정한 지혜를 배웠다고 말했다.

이 스토리는 10년이 지난 2006년 11월, 세계철강협회(WSA) 총회에서 락시미 미탈 회장과 장상태 회장의 큰 아들로 동국제강 그룹을 이끌고 있는 장세주 회장이 조우한 자리에서 상세히 전해졌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不爭의 논리


동국제강 최대의 강점은 노사화합이다. 1994년 봄 노동조합 스스로 ‘항구적 무파업을 선언’한 것도 알고 보면 장상태 회장의 ‘부쟁’(不爭)의 논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노사관계는 한 가족 같은 관계로 맺어져야 하며 현장 근무자들이 경영실태를 이해 할 수 있도록 회사의 경영사정을 공개해야 한다.” 노사는 부모와 자식관계처럼 흉금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오른쪽 첫번째)이 일본 주재원들과 함께 등산을 하고 있다. 사진=동국제강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오른쪽 첫번째)이 일본 주재원들과 함께 등산을 하고 있다. 사진=동국제강

장상태 회장이 원하는 회사는 “동국제강을 30년 다닌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회사이니 너도 동국제강에 들어가라고 추천 할 수 있는 회사”였다.

장상태 회장은 1992년 조세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을 때 “기업이 절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절세하는 것 자체가 기업인의 수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남겼다. 많이 벌어서 세금을 많이 내야 국가를 지탱하는 근본이 된다는 의미였다.

재벌들이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던 것과 달리 장상태 회장이 유산으로 남긴 부동산은 서울 종로구 화동에 살고있던 집 한 채가 고작이었다. 그가 남긴 것은 동국제강 곳곳에서 가동 중인 철강공장 이외에는 없었다.

기업의 목표는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것


1977년에 장상태는 경영이념을 직접 만들었다. “우리는 인간생활의 향상과 개선에 필요한 용품과 용역을 산출하고 나아가 문화발전에 기여한다.” 경영이념의 첫 구절이다. 사령 68년이 된 지금도 행사에 앞서 동국제강 사원들은 경영이념을 낭독한다. 1970년대에 남들은 생각지도 못한 ‘기업시민 정신’을 이미 거론했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1997년 동국제강 포항 신규 건설 현장에 큰 아들 장세주 회장과 함께 방문한 장상태 회장. 사진=동국제강이미지 확대보기
1997년 동국제강 포항 신규 건설 현장에 큰 아들 장세주 회장과 함께 방문한 장상태 회장. 사진=동국제강

장상태 회장은 최첨단의 설비를 갖춘 고로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이 필생의 꿈이었다. 그 염원은 아들인 장세주 회장과 장세욱 부회장 형제가 브라질 CSP제철소를 완공시킴으로써 이뤄졌다. CSP제철소는 지금 미국과 유럽지역에 연간 200만t 이상의 철강 반제품인 슬래브를 수출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브라질 남동부에 위치한 포르탈레자의 뻬쎙부두에는 ‘까이스 송원’(송원부두)이라는 한국식 명판이 세워져 있다. 브라질 지우마 전 대통령의 배려였다. 아들이 아버지의 염원을 이뤄낸 흔적이다.

혼백이 되어도 후배를 돕겠다


장상태 회장은 세상을 하직하기 앞서 포항공장에 기념비를 세우도록 주문했다. 기념비문에는 “항상 최첨단의 설비를 갖추라”는 말이 담겨 있다. 최첨단의 설비야 말로 철강기업의 경쟁력을 뒷받침 한다는 주문이다.

“혼백이 됐을 지라도 기꺼이 달려와 후배들을 도울 것”이라는 포항제강소 건립 기념비문의 마지막 말로 장상태 회장은 동국제강의 영원한 수호신이 되었다.

1997년 신규 건설 중인 연산 72만t의 동국제강 포항 형강공장을 방문한 장상태 회장. 이 자리에서 임직원들에게 세계 제일의 형강공장을 건설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진=동국제강이미지 확대보기
1997년 신규 건설 중인 연산 72만t의 동국제강 포항 형강공장을 방문한 장상태 회장. 이 자리에서 임직원들에게 "세계 제일의 형강공장을 건설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진=동국제강

철강인 송원 장상태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4월 4일)로 22주기를 맞는다. 3일 저녁,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과 일가족들은 화동 장세주 회장의 집에서 22주기 제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4일에는 동국제강 임원들이 고 장상태 회장의 묘소를 찾아가 제를 올리는 전통을 올해도 잇고 있다.

45년 동안 철강 외길을 걸었던 동국제강 고(故) 장상태 회장의 신념과 의지는 한국 유일의 4대를 잇는 철강 명가로 자리 잡게 했다. 미래의 젊은이들에게 지혜롭게 살아가는 빛이기도 하다.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약력이미지 확대보기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약력



김종대 글로벌i코드 편집위원 jdkim871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