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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전 美 반도체 공장 건설 선언한 故 정몽헌 회장 ‘빅 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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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전 美 반도체 공장 건설 선언한 故 정몽헌 회장 ‘빅 픽처’

1995년 국내 반도체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美 현지 공장 건설 발표
세계 최대 공장 설립 후, 유럽‧동남아 등지에 반도체 사업장 확장키로
미국 인프라 활용해 현대전자를 세계적 종합전자기업으로 발돋움 목표
“전자산업은 55% 가능성 판단되면 과감히 결단 내려야” 결단 리더십 강조
4일 19주기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정책에 따르되, 실리 추구해야” 교훈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지난 2013년 7월 22일 서울 연지동 본사에서 열린 ‘故 정몽헌 회장 10주기 추모 사진전’ 개막식에서 정 회장의 얼굴이 그려진 대형 모자이크의 마지막 한 조각을 끼워맞주고 있다. 사진=현대그룹이미지 확대보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지난 2013년 7월 22일 서울 연지동 본사에서 열린 ‘故 정몽헌 회장 10주기 추모 사진전’ 개막식에서 정 회장의 얼굴이 그려진 대형 모자이크의 마지막 한 조각을 끼워맞주고 있다. 사진=현대그룹
1995년 5월 22일 현대전자 본사 대회의실에 정몽헌 현대전자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기자 간담회를 직접 주재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이날 정 회장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미국 현지법인 HEA를 통해 미국 오리건주 유진시 25만평(약 82만6450㎡) 부지에 8인치 웨이퍼 기준 월 3만매를 가공할 수 있는 64메가 D램 반도체 공장을 세울 계획이다”라고 발표했다.
국내 반도체 업체가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현대전자가 처음으로, 같은 시기에 투자를 검토하고 있던 삼성전자보다 빨랐다. 13억달러(당시 환율로 약 1조원)의 투자금도 당시 국내 기업의 해외 투자 액수 가운데 가장 많은 금액이다. 정 회장은 미국에 신설하는 반도체 공장이 “단일 생산 규모로는 세계 최대”라고 했다.

국민에게는 남북경협으로만 관심이 쏠려 있지만, 사실 정 회장은 ‘반도체 경영인’이다. 1983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 회장이 반도체 중에서도 첨단 기술인 초고밀도집적회로(VLSI)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한 ‘도쿄 선언’은 라이벌 기업이었던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 회장을 자극했다, 현대그룹은 그해 앞서 인수한 국도건설의 상호를 현대전자산업으로 바꾸고 반도체 산업에 진출했다. 건설업체인 국도건설을 활용한 것은 이 회사가 경기도 이천에 30여만 평의 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현대그룹은 이 땅을 반도체 공장 부지로 사용했다. 정주영 창업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정 회장에게 맡겼고, 정 회장은 1984년 현대전자 사장에 선임됐다. 1992년에는 회장으로 승진했다. 현대전자가 그룹에서 계열분리 된 2000년까지 회사를 챙겼는데, 그가 최고경영자(CEO)를 맡은 수많은 계열사 가운데 가장 오랜 재임 기간이었다.

1995년으로 돌아와, 정 회장은 미국을 선택한 이유로 “미국의 D램 시장 규모가 가장 크고 이 분야의 기술과 시장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장 위치로 선정한 오리건주에 대해서는 “반도체 기술 및 연구와 생산인력 확보가 용이하고, 오리건 주 정부가 세금 감면 등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다”고 덧붙였다.

정 회장은 이미 현대전자를 세계적인 종합전자 업체로 발돋움 시키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의 첫 시작이 세계 최대 수요처인 미국 직접 진출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선진 인프라‧제도‧인력을 활용해 일본 기업은 물론 국내 라이벌인 삼성전자도 제치고자 했다. 미국 진출 작업은 1990년대 초부터 진행했다. 1991년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하는 메타플로, 1993년에는 TFT-LCD(박막트랜지스터 액정화면) 업체인 이미지퀘스트를 인수했다. 1994년에는 당시 세계 5대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업체인 맥스터를, 이어 TA&GIS의 비메모리 사업부를 인수했다. 1995년 통신 부품 기술을 보유한 TV/COM 투자 소식에 이은 하이라이트가 반도체 공장 건설 발표였다. 정 회장은 미국 내에서 메모리 비메모리 마이크로프로세서 LCD 등 반도체 전 분야에 걸친 연구개발 및 생산체제를 동시에 갖추었다.

정 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96년 2월 27일(현지 시각) 유진공장 착공식 직후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는 2000년까지 미주 유럽 동남아에 5개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고 현지 연구개발 및 기업 인수·합병(M&A)을 추진하는 등 해외 부문에 총 107억달러(약 7조8000억원)를 투자한다는 내용을 담은 중장기 해외투자 전략을 발표했다. ‘전 대륙에 걸쳐 반도체 전 분야를 아우르는 초일류 기업 현대전자의 도약’이라는 그의 행보는 당시 만해도 거칠 것이 없었다.

무모했을 정도로 거침이 없는 정 회장에게 주변에서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전자산업에 대한 확실한 시각이 있었다. 이른바 ‘결단 경영론’이다.
그는 결단 경영론에 대해 “전자산업은 리스크가 큰 사업이다. 따라서 100% 확신을 가질 만한 사업은 거의 없으며 불투명하더라도 55%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결단을 내리고 일단 내려진 결정은 성사되도록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뚜렷지 않은 회색 전망에서도 가능성을 개척하는 결단 경영론은 전자 기업 CEO(최고경영자)에게 필요하다. 의사결정을 할 때 수리적, 객관적 확신을 도출하기 이전에 사업 감각으로 발 빠른 투자를 단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의사결정에는 위험이 따르는 데 이를 걱정해 시기를 놓치면 비용만 투입될 뿐 아니라 아무런 성과도 올릴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정 회장은 내부 경영에 있어서는 ‘기술=인간’이라는 신념으로 인간 중심의 자율 경영을 강조했다.

“미국 기업인들은 무한경쟁 속에서 기업을 키워간다. 위험부담이 없는 사업은 사업이 아니며 현대전자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삼성, 금성(현 LG)이라는 막강한 경쟁상대가 있기 때문이다”라면서, “흑백이 아닌 회색 상태에서 결정을 일단 하면 그것이 흑이든 백이든 목표한 대로 만들어 가는 것이 경영이며 성패는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오는 4일은 정 회장이 별세한 지 19주기를 맞는 날이다. 이날 고인이 영면한 경기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종합 반도체 기업 현대전자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했던 유진 반도체 공장도 2008년 공장 가동을 중단한 뒤 2015년에는 공장자산 매각을 완료해 미국 현지생산을 중단했다.

존 바이든 정부 출범 후 미국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추진 중이며, 이를 위해 한국과 대만 기업의 미국 내 공장 투자를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이에 삼성전자는 미국에 대규모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공장 건설을 확정했으며, 현대전자의 후신인 SK하이닉스도 최근 미국에 반도체 패키징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 10여 년 만에 현지 생산체제를 다시 갖출 예정이다.

재계 전문가는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집착이 산업적 측면을 넘어 중국과의 정치적 이념 갈등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국과 대만, 일본에 ‘칩 4(CHIP 4)’ 참여를 요청하는 등 한국이 끌려다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27년 전 미국을 활용해 시장 상황을 주도하며 현대전자의 발전을 도모했던 정 회장의 기업가 정신의 교훈은 현재 기업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말했다.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