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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 짜던 시절 중공업을 꿈꿨던” 정인영 HL그룹 창업회장 17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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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 짜던 시절 중공업을 꿈꿨던” 정인영 HL그룹 창업회장 17주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 동생, 1976년 독립
한라그룹 통해 원자력 포함 중공업 전 분야 도전
세 번 시련 겪고 재기 성공 ‘재계 부도옹’ 불려
“나도 넘어졌고 다시 일어섰을 뿐이다” 발언 유명
고(故) 운곡(雲谷) 정인영 HL그룹(옛 한라그룹) 창업회장. 사진=HL그룹이미지 확대보기
고(故) 운곡(雲谷) 정인영 HL그룹(옛 한라그룹) 창업회장. 사진=HL그룹
“역경이란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촉매에 불과하다. 뜻을 세우면 길은 열린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Man Do!”

지난 20일은 운곡(雲谷) 정인영 HL그룹 창업회장이 별세한 지 17주기였다. 운곡의 86년 인생은 ‘꿈’, ‘시련’, ‘도전’, ‘역경’, ‘성공’ 등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꿈을 갖고 신념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라(Dream it, believe it and just do it)”를 좌우명 삼아 운곡은 ‘성공은 꿈꾸는 자의 몫’이라는 경구를 신념으로 간직하며 늘 도전했다. 그는 다양한 사업 가운데서도 중화학공업에 매진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들은 전부가 우리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하려는 일들이다”라며 모든 일에 도전했다. 그의 인생은 한국 경제의 축소판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중화학공업에서 일궈낸 성과 때문이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중공업을 개척한 사람은 정인영 명예회장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명예회장님이 개척한 건설 중장비 분야는 현재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09년 12월 온 국민을 들뜨게 만들었던 아랍에미리트(UAE)의 원자력 발전 수주의 초석을 놓은 것도 명예회장님이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원자력 발전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강경호 전 한라중공업 대표이사 부회장은 고인을 이렇게 추억했다.
운곡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형인 아산(峨山)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을 도와 현대그룹이 기반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등 경영수완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중동 진출 건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자 현대양행을 갖고 1976년 독립했다.

현대그룹 시절 운곡은 AID(국제개발처) 차관을 얻기 위해 미국에 갔다가 제철부터 플랜트까지 유기적으로 이어진 보스턴, 피츠버그의 첨단 기계공업 현장을 보고 “중공업 개발 없이 경제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후 1962년에 설립한 것이 현대양행이다.

현대양행은 처음에는 포크나 나이프 등 양식기류를 생산했으나, 1968년 해운사업부를 신설하고 이듬해부터는 자동차 생산에 주력해 프레스 부품들과 히터, 엔진 라디에이터와 같은 기능 부품들로 제품선을 확대했다. 1971년에는 운곡이 아메리칸 호이스트 앤 데릭사를 직접 방문해 기술제휴를 맺고 트럭크레인을 국내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1974년에는 포크레인, 불도저, 모터그레이드 등의 건설 중장비를 국내 최초로 생산했다. ‘한라’라는 상표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현대양행은 운곡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홀로서기 첫해인 1976년, 운곡은 창원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창원공장 건설계획은 수력·화력·원자력 발전용 설비 제작에서부터 제철·석유화학·시멘트·해수담수화 관련 설비까지 총망라하는 대공사였다. 그러나 곧 예상치 못한 시련이 그에게 들이닥쳤다. 일반인은 한 번도 버거운 큰 시련을 세 번이나 겪는다.

1980년 신군부는 중화학공업의 난립을 재편하겠다며 현대양행 창원공장과 군포공장을 ‘강탈’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망했다고 생각했다.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운곡은 “꿈을 빼앗긴 사실이 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창원공장은 대우그룹에 잠시 맡겨졌다가 공기업 한국중공업을 거쳐 현재는 두산그룹의 핵심 주력기업인 두산에너빌리티(전 두산중공업)가 됐다.
운곡은 절망했으나 좌절하지 않았다. 압구정동 배나무 밭 사이에 있는 자택을 베이스 캠프로 18명의 임직원들과 함께 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먼저 현대양행의 안양공장 상호를 ‘만도기계’로 바꾸었다. 만도(萬都)는 정 회장의 재기 의지를 담은 ‘인간은 할 수 있다(man do)’는 뜻과 ‘1만 가지 도시’를 뜻하는 말로 정 명예회장이 직접 지었다.

그는 한라그룹과 만도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술확보뿐이라고 생각했다. “기술지상(技術至上), 기술로 승부하라!”라는 구호 아래 1984년 만도기계연구소를 개설해 자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평택, 경주, 문막, 아산, 익산 등지에 부품별 전문 생산공장을 건설했다. 1986년에는 미국 포드사와 공동으로 한라공조를 설립해 자동차 부품 생산의 전문화를 추구했다. 1980년대 자동차 산업 호황과 함께 만도기계는 빠른 성장을 거듭했다.

이런 가운데 두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운곡은 1989년 과로 때문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좌반신이 마비됐고 언어장애까지 생겼다. 증세가 워낙 심했지만 그는 “병을 이기는 것도 사업”이라며 다시 일어섰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그룹 경영을 진두지휘했다.

“넘어지지 않은 사람은 행운아다. 많은 사람은 넘어진다. 나도 넘어졌고 다시 일어섰을 뿐이다.”

재계는 그런 운곡에게 ‘휠체어 부도옹’, ‘재계의 부도옹’이란 별칭을 지어줬다.

현대양행을 빼앗긴 뒤 10년 만인 1989년 한라그룹 매출액은 1조원에 육박했고, 1997년에는 재계 12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해 발발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한라그룹 부도라는 세 번째 시련을 맞았다. 운곡은 1999년 모태 기업인 만도기계를 매각하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 끝에 한라그룹을 되살렸다. 그룹을 살린 그는 2006년 7월 20일 별세했다. 아들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2년여 후인 2008년 3월 만도기계를 되찾았다.

운곡은 “역경이란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촉매에 불과하다. 뜻을 세우면 길은 열린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Man Do!”라고 했다. ‘만도(萬都)’는 운곡이 재기 의지를 담아 직접 지은 단어로, ‘인간은 할 수 있다(man do)’는 뜻과 ‘1만 가지 도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운곡이 한라그룹을 키워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기반은 ‘기술’이다. 그는 기술에 대해서는 무모할 정도의 집착을 보였다. 한라그룹과 만도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술확보뿐이라며, 임직원들과 함께 늘 “기술지상(技術至上), 기술로 승부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기술지상은 한라그룹의 경영철학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창립 60주년이었던 2022년 한라그룹은 그룹명을 ‘HL그룹’으로 교체했다.

‘베를 짜던 시절에 중공업을 꿈꿨던’ 운곡은 “꿈꾸는 자만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지금도 여전히 중공업이 멸시와 무시를 당하고 있지만 운곡이 살아있었다면 또다시 “중공업 개발 없이 경제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며 당장은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면 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