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랫말처럼 내 땅, 우리 땅, 조상들이 대대로 지켜왔던 독도는 한국 남자 6명이 물개를 잡아 먹으며 지켜낸 무인도였다. 일본이 영토권을 주장해도 독도는 확실한 우리 땅이란 기록이 ‘독도’(1965년 대한공론사 발행)란 책자에 잘 기록되어 있다.
6‧25전쟁에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에 홍순칠씨는 독도 수비대장을 맡으면서 자비를 들여 수비대를 이끌었다. 당시 나이는 37세. 그가 독도 수비를 결심한 것은 조부인 홍종욱씨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 난 이후부터라고 한다. 홍순칠 씨는 한 몸 기꺼이 조국에 바치겠다는 일념으로 독도 수비대를 결성했다. 홍씨 일가는 홍종욱씨의 외조부가 호조참판을 지내다가 독도로 유배된 이래 줄곧 무인도에서 살아왔다.
홍순칠씨는 5명의 동지들과 무인도인 독도를 수비하면서 필요한 경비 일체를 그의 전답을 팔아 충당했다. 교사 자격증을 가졌던 홍순칠 씨의 아내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3남매를 이끌고 뭍으로 나가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이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 그곳에서 서식하는 물개를 잡아 포로 떠서 말렸다가 주린 배를 채웠다.
독도 수비대는 일본인들이 자주 독도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혜를 동원했다. 통나무를 대포처럼 보이게 여러 군데 걸쳐 놓고 그것을 갑바로 덮어 놓았다. 일본 군함과 선박들이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면 영락없는 대포로 보였으니 섣불리 침범할 수 없었다.
간혹 일본 밀엽꾼들이 물개를 잡아 궁중에 헌납하려고 독도에 몰래 침입해 들어왔으나 홍순칠 대장과 수비대에 걸려 흠씬 두둘겨 맞은 이후에 산채로 일본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일본 밀엽꾼들에게 독도 수비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1954년 11월21일 일본 해상보안청의 군함이 독도 침입했다. 독도수비대는 가늠자도 없었던 유일한 공용화기인 박격포를 쏘았다. 5발 중 1발이 명중해 일본 군함은 아수라장 이됐다. 일본 군함의 침범은 3번차례나 있었다. 이 일은 일본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한국내 고위층에도 알려졌다. 후일 역사가들은 이 일을 ‘독도대첩’으로 명명했다. 당시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경찰국장 김종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을 헤아려 독도 수비대를 위문한다. 경찰 밴드와 부인회, 도의원 신문기자 등을 대동했다. 위문단은 홍순칠 수비대장을 얼싸안으며 ‘장한 대한의 청년’이라고 위로했다. 이 와중에 비바람을 동반한 폭풍이 철사줄로 동여맨 수비대의 주거시설을 날려 보낼 정도로 기승을 부렸다.
위문단을 철수 시키는 과정도 쉽지가 않았다. 급기야 그가 휴대했던 카메라 세트가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경사 한 사람이 카메라 수색도중 바람에 추락해 사명했다. 이런 악조건을 지켜본 김종원 국장은 이벤트를 벌였다.
“위문단 여러분 우리 독도를 수비하고 있던 애국자들을 위해 이 독도커피 한 모금을 마십시다.” 독도커피는 주거시설과 통나무 대포를 붙잡아 맨 철사에 서려있던 녹슨 물로 만든 커피였다. 이 장면의 진의가 어떻든 사재를 털어 독도를 수비했던 홍순칠 독도수비대장의 국가관과 ‘독도커피’를 들어 올리는 위문단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등줄기가 싸해진다.
독도수비대 6명은 후에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오늘은 독도대첩이 발생한지 만 69주년이 되는 날이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