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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가장 화려한 '사양 산업' 출판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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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가장 화려한 '사양 산업' 출판업

윤소연 파지트 에디터
윤소연 파지트 에디터
연말의 어느 날 이른 아침, 예전에 담당했던 저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출간 후 저자에게 전화가 올 경우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임해야 한다. 책에 문제가 있다고 속상함을 토로하기 위한 연락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락하신 저자분은, 편집상의 실수 등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오래전에 책을 내셨던 분이다. 경계태세를 풀고,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곧 구순을 바라보시는 선생님께서 정정한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해 주신 후 짧은 안부를 주고받았다. 함께했던 책들을 다시 보고 있는데, 내가 생각나 연락하셨다고 한다. 사실 그 책은 처음 출판사에 취직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담당했던, 가장 아쉽고 부끄럽고 아픈 손가락이었다. 책을 펼치면 바로 틀린 부분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아직 책을 펼쳐 보지 못한 책. 그런데, 이때가 아니면 내 마음을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아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고맙다고, 살고 계신 지역에 오면 꼭 한번 만나자고 하시면서 전화를 끊었다.
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통화였지만, 이제야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는 편안함과 동시에 내가 이 책에 깃들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함께 책에 깃들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책에는 저자의 지식과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 뒤편에는 어쩌면 그 이야기를 저자보다도 더 많이 읽어 보고 다듬어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 하여 주는 편집자가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더 매력적으로, 독자들의 눈에 들어오게끔 해 주는 디자이너가 있다. 본문과 표지 데이터가 마무리되면 내용에 따라 어떤 재질의 종이를 몇 그램으로 쓸지 고민해 주는 인쇄소 사장님과 그 종이를 공급해 주는 지업사가 있다. 인쇄소에서는 판을 뜨고, 도수에 맞춰 잉크를 준비하고, 인쇄를 시작하고, 인쇄물들을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그 후, 후가공 작업에 들어가고, 제본소에서는 인쇄된 종이들을 묶는 제본 작업을 한다. 이렇게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책은 책이 보관되는 물류센터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전국의 서점에 들어가고 서점 MD들과 출판사 마케터들은 이 책을 알리기 위한 준비를 한다.

이렇게 책은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탄생한다. 한 권의 책도 쉽게 나올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은 그 어떤 물건보다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산출물이라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그런데도 출판계가 가장 많이 듣고, 많이 하는 소리는, ‘책은 이제 사양 산업인데…’, ‘출판업은 이제가망이 없어’, ‘책이 팔리니?’이다. 하지만 사양 산업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매년 출판사와 독립 서점, 도서관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어쩌면 많은 니즈가 있지만, 출판계가 그 니즈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일까 싶은 생각도 든다. 박서련의 단편소설 <거의 영원에 가까운 장국영의 전성시대>에 몇 백 년 후의 미래에서 영화는 가장 ‘화려한 사양산업’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가장 화려한 사양산업이라. 가장 역설적인 단어이지만, 출판업계가 이 단어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의 지식, 누군가의 경력과 경험들 그리고 아이디어가 한 데 모여 있는 이 화려한 사양 산업인 출판업에 한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렇게도 많은 전문가들의 생업이 달려 있는 이 분야를 사양 산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출판계에 대한 시선을 아날로그, 사양 산업이라는 표현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묵묵하게 지켜 나가는 전문가 집단으로 바라봐 주는 것은 어떨까.


윤소연 파지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