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원산의 능소화(凌宵花)는 꽃의 색깔도 중국 색을 닮았다. 능소화의 능은 ‘능멸하다, 업신여기다’의 능(凌)이고, 소는 하늘 소(宵)이니 문자 그대로 ‘하늘을 능멸하며 피는 꽃’이다. 태양이 뜨거운 여름의 중심에서 겁도 없이 초록 넝쿨 위로 하늘을 능멸하듯 피어나는 능소화의 기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어느 시인은 태양을 능멸하며 피는 꽃이라 노래하기도 했다.
능소화의 그 당당함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대지를 달구는 태양의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록의 넝쿨은 지칠 줄 모르고 하늘을 향해 오르며 요염한 자태로 피어나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능소화를 보고 있으면 제아무리 여름이 뜨거워도 견딜 만하다고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만 같다. 또 하나 능소화의 미덕이라면 시들 때까지 버티지 않고 가야 할 때를 아는 것처럼 가장 아름다울 때 한 점 미련 없이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단호함이다. 낙화의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비라도 내리는 날 능소화 핀 골목에 들어서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린 싱싱한 능소화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추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스스로 생의 끈을 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능소화나 해바라기 같은 여름꽃들의 특징이라면 단연 '견딤'이다. 태양과 당당히 맞서서 견디는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한 성경의 말씀처럼 묵묵히 견뎌내는 것이다. 견디어서 마침내 이겨내야 하는 것이 인생인 것처럼. 한사코 하늘을 향해 담벼락이나 나무를 타고 오르는 악착같은 끈질김, 태양이 가장 뜨거울 때 아무나 범접하기 어려운 귀티 나는 황홍색으로 피어나는 도발적이면서도 화려한, 가냘픔 대신 희망을 알리는 천사의 나팔처럼 싱싱하고도 단아한 맵시의 매혹적인 꽃을 보고 있으면 무더위에 지쳐 주저앉는 몸을 나도 모르게 추스르게 된다.
중국 원산의 능소화지만 오래전부터 심고 가꾸어 우리 꽃이나 다름없는 꽃이다. 담장이나 벽을 타고 올라가는 능소화가 대부분이지만 고목을 타고 올라가며 핀 능소화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능소화도 여러 종류가 있다. 예로부터 심고 가꿔온 능소화는 꽃이 등황색이고 꽃받침은 연두색이며 꽃도 균형이 잡혀 아름답다. 반면 미국능소화는 꽃통이 훨씬 길쭉하고, 꽃이 진한 붉은색이고 꽃받침도 붉은색이다. 가지 끝에 꽃이 모여 달린다. 그런가 하면 능소화와 미국능소화의 교잡종인 마담갈렌능소화는 꽃은 붉은색이고 꽃받침은 노란색에 가깝다. 혹자는 다양한 능소화를 두고 미적 우열을 따지기도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 싶다.
사람에 따라 호오(好惡)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질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꽃일진대 미적 우열을 따지기보다는 각자 취향에 따라 심고 가꾸면 될 일이다. 그보다는 고목을 타고 오르며 서로 의지하고 기대며 눈부신 꽃을 피우는 능소화를 보며 태양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꿋꿋이 견디며 여름을 건너갈 의지를 다지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백승훈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