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독립공원에서 시작해 안산자락길을 걸으며 숲에 도착한 가을을 오감으로 느낀 하루였다. 공원 바닥으로 후둑후둑 떨어지며 사람을 놀라게 하던 칠엽수 열매와 붉게 익은 팥배나무 열매, 그리고 붉나무 열매와 아직은 푸른 밤송이들까지 이 땅에 가을이 찾아왔다고 말하는 듯하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 열매가 빛나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열매보다는 꽃에서 가을을 직감한다. 여름꽃들이 물러간 자리에 피어나는 처음인 듯 소담스레 피어나는 가을꽃들, 연보랏빛 쑥부쟁이와 벌개미취, 억새와 여뀌와 물봉선, 고마리 같은 꽃들이 풀어놓는 가을 향기는 매혹적이다.
그중에도 서울 도심의 안산자락길에서 가을꽃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꽃무릇을 만난 것은 정말 뜻밖의 행운이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욱 반가웠고, 그 붉디붉은 처연한 아름다움에 한동안 말을 잃고 말았다. '석산'이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은 수선화과에 속하는 알뿌리식물로 9~10월에 붉은 꽃을 피운다. 잎은 꽃과 꽃대가 모두 사라진 11월께 땅바닥에 개난초 비슷하게 생긴 잎이 나와 다음 해 5월쯤 시들어버린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상사화라고도 부르지만 여름에 피는 분홍빛 상사화와는 한 집안이긴 해도 분명 다른 꽃이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은 같지만 봄에 잎이 먼저 피었다 진 뒤에 꽃을 피우는 상사화와는 정반대다.
꽃무릇 여행의 1번지로 꼽히는 고창 선운사를 비롯하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등 유독 절집 주변에서 꽃무릇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사찰에서 그 쓰임새가 요긴하기 때문이다.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함유돼 있어서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할 때 찧어서 바르면 좀처럼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비늘줄기에 품은 유독물질을 제거한 다음 얻은 녹말로 한지를 붙이면, 강력한 살균력 때문에 역시 좀이 스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남도 지방에서나 볼 수 있던 꽃무릇을 안산자락길에서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나무 데크 산책로를 따라 한두 송이씩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산책로를 따라 군락을 이룬 곳도 있다.
마치 여인의 슬픈 속눈썹처럼 긴 꽃술을 사방으로 펼치고 그리움에 절여져 핏빛처럼 붉은 꽃무릇 핀 길을 따라 걸으며 “가장 위대한 기쁨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존 베리모어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해 화엽불견초(花葉不見草)라 불리지만 숲을 찾는 많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행복감을 주는 꽃무릇이야말로 위대한 기쁨을 아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일상에 부대끼느라 먼 길 떠날 수 없다면 남도의 절집을 찾는 대신 안산자락길을 찾아 꽃무릇 붉게 핀 산책로를 거닐며 그리운 사람을 맘껏 그리워하자. 미당이 말했던 것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들 때까지…….”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