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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안산자락길에서 꽃무릇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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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안산자락길에서 꽃무릇을 만나다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안산자락길을 걸었다. 세상 끝까지 갈 것만 같던 늦더위도 한풀 꺾이고 대지의 기운이 서늘해진 요즘이 걷기엔 더없이 좋은 때다. 서대문구에 있는 안산자락길은 전국 최초의 순환형 무장애 자락길로 숲을 찾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서대문구의 관광명소다. 총 7㎞의 숲길은 한 바퀴를 도는 데 천천히 걸으면 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경사도 9% 미만으로 조성하여 휠체어나 유모차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바닥을 평평한 나무 데크나 친환경 마사토, 굵은 모래 등으로 조성하여 휠체어와 유모차는 물론 장애인, 노약자, 어린이 등 보행 약자도 쉽게 숲을 볼 수 있다. 인왕산 줄기인 무악(毋岳)은 높이가 296m로 서울 남산보다 약간 높다. 총 7㎞ 길이의 숲길이다. 동봉과 서봉으로 이루어진 산의 생김새가 말의 안장처럼 생겨서 안산(鞍山)으로 부른다.

서대문독립공원에서 시작해 안산자락길을 걸으며 숲에 도착한 가을을 오감으로 느낀 하루였다. 공원 바닥으로 후둑후둑 떨어지며 사람을 놀라게 하던 칠엽수 열매와 붉게 익은 팥배나무 열매, 그리고 붉나무 열매와 아직은 푸른 밤송이들까지 이 땅에 가을이 찾아왔다고 말하는 듯하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 열매가 빛나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열매보다는 꽃에서 가을을 직감한다. 여름꽃들이 물러간 자리에 피어나는 처음인 듯 소담스레 피어나는 가을꽃들, 연보랏빛 쑥부쟁이와 벌개미취, 억새와 여뀌와 물봉선, 고마리 같은 꽃들이 풀어놓는 가을 향기는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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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도 서울 도심의 안산자락길에서 가을꽃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꽃무릇을 만난 것은 정말 뜻밖의 행운이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욱 반가웠고, 그 붉디붉은 처연한 아름다움에 한동안 말을 잃고 말았다. '석산'이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은 수선화과에 속하는 알뿌리식물로 9~10월에 붉은 꽃을 피운다. 잎은 꽃과 꽃대가 모두 사라진 11월께 땅바닥에 개난초 비슷하게 생긴 잎이 나와 다음 해 5월쯤 시들어버린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상사화라고도 부르지만 여름에 피는 분홍빛 상사화와는 한 집안이긴 해도 분명 다른 꽃이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은 같지만 봄에 잎이 먼저 피었다 진 뒤에 꽃을 피우는 상사화와는 정반대다.

꽃무릇 여행의 1번지로 꼽히는 고창 선운사를 비롯하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등 유독 절집 주변에서 꽃무릇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사찰에서 그 쓰임새가 요긴하기 때문이다.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함유돼 있어서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할 때 찧어서 바르면 좀처럼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비늘줄기에 품은 유독물질을 제거한 다음 얻은 녹말로 한지를 붙이면, 강력한 살균력 때문에 역시 좀이 스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남도 지방에서나 볼 수 있던 꽃무릇을 안산자락길에서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나무 데크 산책로를 따라 한두 송이씩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산책로를 따라 군락을 이룬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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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여인의 슬픈 속눈썹처럼 긴 꽃술을 사방으로 펼치고 그리움에 절여져 핏빛처럼 붉은 꽃무릇 핀 길을 따라 걸으며 “가장 위대한 기쁨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존 베리모어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해 화엽불견초(花葉不見草)라 불리지만 숲을 찾는 많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행복감을 주는 꽃무릇이야말로 위대한 기쁨을 아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일상에 부대끼느라 먼 길 떠날 수 없다면 남도의 절집을 찾는 대신 안산자락길을 찾아 꽃무릇 붉게 핀 산책로를 거닐며 그리운 사람을 맘껏 그리워하자. 미당이 말했던 것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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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