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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5차 중동전쟁 미국 책임론…맥마흔 vs 밸푸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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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5차 중동전쟁 미국 책임론…맥마흔 vs 밸푸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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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박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왜 싸울까? 모든 싸움에는 이유가 있다.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는 데에는 오랜 역사적 곡절이 있다. 알고 보면 이 두 민족은 뿌리가 같다. 둘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아브라함은 ‘열국(列國)의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성경 구약성서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데라, 아내 사라, 형제 나홀, 그리고 조카 롯과 함께 하란으로 갔다.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 그의 나이 75세에 다시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으로 이주하였다. 창세기 12장의 기록이다. 그는 86세에 애굽인 여종 하갈에게서 첫 아들인 이스마엘을 낳았다. 이스마엘은 이복동생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사랑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100살 때 정실 부인 사라에게서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이삭이 태어나면서 이스마엘의 운명이 달라진다. 성경에는 이스마엘이 이복동생 이삭을 희롱한 일로 사라의 미움을 사서 하갈과 함께 쫓겨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스메일은 광야를 떠돌며 거기서 만난 애굽 여인과 결혼했다. 이스마엘에게는 모두 12명의 자식이 있었다. 장남인 느바욧과 게달, 앗브엘, 밉삼, 미스마, 두마, 맛사, 하닷, 데마, 여둘, 나비스, 그리고 게드마다가 이스마엘의 자식들이다. 이들이 오늘날 아랍인의 선조들이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이처럼 처 첩 간의 갈등 속에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서기 570년에 이스마엘의 후손인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포교하면서 아랍인과 유대인의 사이는 더 벌어졌다. 종교적으로도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갈라진 것이다. 아랍인과 유대인은 성지 예루살렘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싸워왔다. 중세 십자군 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1차 대전을 계기로 또 한번 운명의 전쟁에 돌입한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제국의 약화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미끼로 아랍민족과 유대인들 모두에게 독립국가를 창설시켜준다는 이율 배반적 약속을 하였다. 영국 외상 밸푸어는 1917년 유대인의 전쟁 협력을 얻기 위해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건국을 약속했다. 앞서 1915년에는 아랍인들에게도 '맥마흔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내 아랍인 거주 지역의 독립을 약속한바 있다.

영국은 전쟁 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신의 위임통치 지역으로 편입시킨 뒤 그 지역으로 이주해 오는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했다. 여기에 아랍인들이 강력 반발하면서 반유대인 운동이 확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다. 유엔은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SCOPUN)를 설치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으로 분할시키는 안을 채택하였다. 유엔 주재안에 유대인들은 기꺼이 수락한 반면 아랍 측은 거부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를 비롯한 7개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에 무력적 항쟁을 벌이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전과를 올리면서 팔레스타인인 90만 명이 유랑민으로 전락하였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했다. 이것이 제1차 중동전쟁이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한 직후 이에 반발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시작됐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와 함께 이스라엘은 독립국이 됐지만 영국군이 철수한 바로 다음날 이집트 전투기가 이스라엘을 폭격했다. 이스라엘은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20일 넘게 버티며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1948년 6월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 협정이 시작됐다. 협정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으로 힘을 키운 뒤 이집트 카이로, 요르단 암만,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폭격해 승리를 거뒀다. 그 결과 1949년 2월에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 독립전쟁으로도 불린다.

제2차 중동전쟁은 1956년 7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네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1952년 7월 쿠테타로 국왕을 쫓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나세르 대통령은 1956년 수에즈 운하 회사와 운하통행료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가 공군을 동원해 수에즈를 폭격했고 이스라엘도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 시나이반도를 침공했다. 3국 연한군은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반도를 점령했지만 세계 대전으로 번질 위험성에 미국과 소련이 압력을 가해 11월 유엔 총회에서 정전안이 채택됐다. 이후 시나이 반도에는 유엔긴급군이 투입됐고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즉각 철수했다. 아랍권에서는 이 전쟁을 삼국 침략이라고도 부른다.
1967년에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아랍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 해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전 전쟁의 패배를 복수하고 아렵권의 결속 강화를 노린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해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했다. 6월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전쟁이 개시됐고, 이후 전쟁은 시리아와 요르단으로 확대됐다.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들의 전면전에서 이스라엘은 공군기로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해 전투기 300대를 파괴하고 이후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의 전투기도 416대 파괴해 우위를 점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점령하고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과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격했다. 6월 유엔 안보리는 즉시 정전을 결의했고, 쌍방 수락에 의해 정전이 실현됐다. 제 3차 중동전쟁은 6일만에 끝나서 6일 전쟁이라고 불린다.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비롯한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게 됐다.

제4차 중동전쟁은 1973년 10월 이집트의 기습 선제공격으로 시작됐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축제일인 욤키푸르(사죄의 날)에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17개 여단이 전멸됐다. 시리아 역시 소련제 무기를 앞세워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승리가 눈앞이었으나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대적으로 지원하며 전황이 역전됐다. 미국은 30일간 포위됐던 이스라엘에 비행 수송작전을 통해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반격에 나선 이스라엘은 비교적 허약한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집중포격했다. 골란 고원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 군 탱크 867대와 차량 3000대 이상을 파괴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는 크고 작은 분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87년에는 순찰 중이던 이스라엘군 차량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치어 숨지게 한 사고로 제1차 인티파다가 촉발됐다. 이스라엘의 차별정책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불만이 폭발해 요르단강 서안 등 이스라엘 점령지의 민중 주도도 발생한 저항 운동인 제1차 인티파다는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진행됐다.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 방법을 모색한 합의로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정부 출범의 계기가 됐다.

2000년 9월에는 제2차 인티파다가 발생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야당(리쿠드당) 지도자이던 아리엘 샤론 총리가 무슬림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을 도발적으로 방문하면서 시작된 제2차 인티파다는 이스라엘의 강경 진압으로 유혈충돌로 확산됐다. 그 결과 오슬로 평화협정도 파기됐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다시 점령하게 됐다.

2008년에 12월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인 하마스의 로켓 공격을 최소화한다는 명목으로 가자지구를 공습했다. 이듬해 1월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했고 하마스 측도 휴전을 선언하며 끝나게 공습은 끝났다.되면서 양측의 대립은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의 동해안 일대를 가리키는 지역을 말한다. 지중해를 따라 좁고 긴 평야가 펼쳐지고, 동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 중앙은 구릉 지대이다. 이 지역에는 구석기 시대 전기부터 인간이 살고 있었다. 북쪽의 카르멜 산에서 출토된 네안데르탈 형 및 호모사피엔스 형 화석 인골은 인류의 진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표본으로 특히 유명하다. 옛날에 가나안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기원전 12세기에 팔레스타인 인이 지배하게 됨에 따라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원전 11세기에 헤브라이 인들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였으나 솔로몬의 사후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리되어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를 받았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로마가 망한 후 이슬람 교도들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영국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으나 세계 대전 기간 중 팔레스타인의 처리 문제를 두고 영국이 두 가지 모순된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둘러싸고 아랍·유대인 사이에 심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유대 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함으로써 여러 차례 중동 전쟁이 발생하였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과 부근 여러 나라의 영토 일부를 점령하였다. 잇단 중동 전쟁으로 발생한 이른바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는 300만 명이 넘는다. 이 아랍인들은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1964년 이후 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를 모체로 삼고 게릴라 조직을 만들어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에 나섰다. 1975년 국제 연합은 팔레스타인의 민족 자결권과 PLO를 준국가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1993년 9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에 평화 협정이 맺어져 가자와 웨스트뱅크 지역에 팔레스타인 자치 기구를 설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분쟁은 해결되지 못한 상태이다.

팔레스타인은 현재 독립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국가로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2011년 10월 31일에는 유네스코(UNESCO)로부터 유엔 산하기관 최초로 정회원 국가 지위를 인정받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유네스코 회원국 가입을 반대했다. 유네스코에 재정을 지원하던 미국은 지원 중단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스라엘과 미국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은 2012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옵서버 국가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유대인 정착촌 확대 건설과 1994년 체결한 파리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정부를 대신해 징수한 세금에 대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의 송금 중단으로 맞섰다.

이번 하마스의 로켓 공격이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 등은 그 뿌리가 영국의 이중계약에서 부터 유래한다. 영국의 그 이중계약을 이어받아 유엔에서 아랍의 동의없이 유대인의 정착지를 부여한 미국도 이 이중 계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발표된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인 것이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미국 영국 등 서방의 책임론이 거론되는 이유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주필/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