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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마음 안에 봄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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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마음 안에 봄을 세우다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입춘(立春)이다. 24절기 중 첫 절기인 입춘의 입은 들 입(入)자가 아닌 설 립(立) 자를 쓴다. 굳이 그 까닭을 나름대로 부연하자면 입춘은 겨울에서 봄이라는 계절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인간도 마음속에 봄을 일으켜 세우는 때라는 의미가 담긴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혹시나 어딘가 와 있을지도 모를 봄기운을 찾아 숲길을 걷는다. 숲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백목련의 꽃눈이 오늘따라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며 눈을 찔러온다. 입춘이 되기도 전에 홍릉 숲에는 복수초가 피었다는 뉴스를 본 게 며칠 전이었는데 도봉의 숲은 여전히 겨울빛을 간직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얼음 풀린 계곡의 여린 물소리마저 없다면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하지만 나는 숲을 거닐며 봄을 느낀다. 뺨을 스치는 바람결에서, 바람에 쓸리는 우듬지의 잔가지에서 겨울을 견딘 맥문동의 초록 잎에서, 바위를 덮고 있는 이끼의 푸른 빛에서, 나무 사이로 비껴드는 은빛 햇살에서 서서히 일어서고 있는 봄을 감지한다. 얼핏 보면 낙엽에 덮여 겨울잠에 취한 듯 보이는 숲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새싹의 기미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바람의 치마폭을 잡고 일어서는 그 여린 새싹들이 마른 숲에 생명의 봄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天下之至柔(천하지지유) 馳騁天下之至堅(치빙천하지지견)이라 하여 '천하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가장 단단한 것을 이긴다‘고 했다. 형체도 힘도 없는 물이지만 단단한 흙덩이를 듬뿍 적시면 그 흙은 스스로 무너지고, 단단한 바위 틈새로 물이 스며들면 바위도 마침내 부서지고 만다. 아래로 흐르면서 만물을 적시는 물이 지닌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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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높은 산에는 희끗희끗한 전설에 덮여 있고 숲에 부는 바람은 여전히 냉기를 품고 있지만 가만 귀 기울이면 언 땅을 뚫고 일어서는 여린 새싹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이명처럼 귓전을 울린다. 입춘 무렵이면 겨우내 동안거에 들었던 나무들도 기지개를 켜고 다시 물을 길어올리기 시작한다. 고로쇠 수액 채취가 이루어지는 것도 이즘이다. 발목까지 빠질 만큼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 없는 2월의 숲속을 천천히 걷는다. 이따금 밟히는 낙엽 사이로 언뜻언뜻 새싹들이 눈에 띈다. 첫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일부러 찾지 않아도 봄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우리를 찾아온다.

꽃을 찾는 사람들은 벌써 산으로, 들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쁜 일상에 쫓기어 봄이 오는지 겨울이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마주친 꽃을 보고는 봄이 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있다.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는 말이다. 삶이 고단해지면 오고 가는 계절에 둔감해지기 쉽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봄이지만 마음의 빗장을 풀지 않으면 설레는 봄을 맞이할 수 없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크게 한 번 기지개를 켜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 안에 봄을 세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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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에서는 봄이 되면 자연에서는 생기가 일어나고 만물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므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뜰을 여유롭게 거닐며 머리는 꽉 묶지 말고 느슨하게 풀고 몸을 이완하여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게 봄기운에 상응하는 양생법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살리는 데 힘쓰고 죽이지 않으며 베풀되 빼앗지 않고, 벌 대신 상을 주는 봄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바쁜 일상이라 해도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살피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올봄에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봄‘이라 말만 해도 어딘가에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