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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우리 뇌는 다양성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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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우리 뇌는 다양성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김신혜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
김신혜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
부쩍 우리 사는 세상이 참 다양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예전에는 흥행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한 편 있으면 대부분 같은 콘텐츠를 소비하고, 함께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너무 다양한 선택지 앞에서 같은 것을 소비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이 다양해지고 각자가 삶 속에서 선택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세분화되면서, 각자가 가지는 관점들도 이제는 비슷하기보다 미묘하게 다르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참 많다. 100가지 옵션 중에 10가지만 동의하고 나머지 90가지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 획일화돼 있던 것이 5가지의 다름으로, 5가지의 다름이 수만 가지의 다양성으로 변해 가는 것은 사실 우리 사는 세상의 큰 경쟁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다양성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는 사실 그 누구도 배운 적이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DEI라고 불리는 개념에 대해 조직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DEI는 Diversity(다양성), Equity(형평성), Inclusion(포용성)을 뜻한다. 국적이나 언어, 성별처럼 다른 문화권의 경험을 했음이 분명해 보이는 특성 외에도 크고 작은 삶의 경험과 선택들이 엄청난 다양성을 기하급수적으로 만들어내는 시대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 역시 불확실하게만 느껴지지만, 결국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은 다양성이 잘 융합된 집단지성의 힘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전문가들은 얘기하고 있다.
우리가 일을 할 때는 ‘논증’의 방법으로 사고하고 소통한다. 논증은 전제와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어떠한 결론을 주장하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다양성은 옳고 그름을 주장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라 존중하고 인정돼야 하는 영역이다 보니, 특히 조직에서 점점 넓어지는 다양성을 어떻게 포용해야, 함께 일하고 더 좋은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그토록 고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양성은 포용을 통해서 조직의 자원이 된다. 그러려면 먼저 다양성, 즉 다름을 ‘인지’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의 뇌가 어떤 방식으로 다름을 ‘인지’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리의 뇌는 효율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A는 B다’라는 기준을 만들고, 이 기준을 가지고 추론을 통해 판단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추론법에는 잘 알려진 연역법과 귀납법, 그리고 가설적 추론법이라는 3가지 방법이 있다. 실용주의 철학으로 유명한 찰스 샌더스 퍼스라는 미국의 철학자가 콩 주머니를 활용해 각 추론법을 비교한 예를 활용해보자. ‘이 주머니 안에 있는 모든 콩은 하얗다’라는 기준이 있다. 그리고 ‘이 콩은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내가 경험한 사례가 있다.
연역법은 기준을 기반으로 경험과 현상 또는 상태를 논증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 주머니에 있는 모든 콩이 하얗고, 나는 이 주머니 안에서 콩이 나온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콩은 하얗다’라는 현재 상태가 결정된다. 연역법의 특징은 현상이나 상태가 기준과 경험이라는 두 가지 전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에, 틀릴 가능성이 없는 논리다. ‘기준’을 내가 수용하고, 내가 경험을 통해 인지한 사례를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그 현상과 결과에 대해 확신하여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귀납법은 경험으로 시작해 현재 상태를 통해 기준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내가 이 콩이 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라는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이 콩이 하얗다는 상태를 확인했다면 이 주머니 안에 있는 모든 콩은 하얀색일 거라는 기준을 유추할 수 있다. 귀납법은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경험 속의 패턴을 찾음으로써 기준에 대한 통찰을 얻는 방법이다. 그래서 기존과 다른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지만, 이렇게 발견된 기준이 100% 옳다는 명제가 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가설적 추론이란 무엇인가? 가설적 추론이란 기준과 현재 상태를 가지고, 경험을 도출하는 방식이다. 콩의 예를 계속 활용한다면, 이 주머니 안에 있는 모든 콩은 하얗다는 기준을 가지고, 이 콩이 하얀색이라는 상태를 확인한 후에, 이 콩은 이 주머니에서 나왔을 것이라며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 그 사례를 추측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가설적 추론을 통해 얻은 결론은 사실상 가설에 가까우며, 가장 불확실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를 통해 새로운 가설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성이 넓어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학습된 것들을 기준으로 인지한다. 그것이 가치 있을수록 신념으로 자리매김되기도 한다. 그리고 뇌는 많은 경우, 새롭게 지각하게 되는 어떤 현상이나 대상의 상태에 대해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경험했던 기억으로,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즉, 무의식적으로도 뇌는 끊임없이 가설적 추론을 통해 인지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완벽주의자는 함께 일하기 피곤하다’라는 기준이 있고, 새로 합류한 동료가 스스로를 완벽주의자라고 소개하거나 일을 꼼꼼하고 완벽하게 해내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저 사람은 보나마나 같이 일하기 피곤할 것이다’라는 추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추론은 과거의 내 경험을 통해 저장된 빅데이터를 활용했기 때문에 마치 내 경험의 일부처럼 느껴지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나의 생각은 새로 온 동료에 대한 나의 추론이지 실제 경험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내가 믿고 있는 대다수의 기준과 신념들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내가 경험한 완벽주의자들이 나를 피곤하게 했었을 수는 있으나, 세상의 모든 완벽주의자가 모든 동료를 피곤하게 한다는 기준은 엄청난 오류를 가지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옳다고 믿거나, 옳고 그름 혹은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나의 기준들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메타인지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내가 인지하고 싶은 방향을 이해하고, 그것이 나의 과거 경험에 의한 추론인지, 실제 현재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경험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우리 뇌의 가설적 추론은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불확실한 문제에 대한 참신한 해결책을 찾고, 낯선 것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살피고 헤아려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생산해낼 수 있지만, 나의 과거의 경험과, 무의식에 뿌리박힌 나만의 기준을 인지하지 못하고 고집한다면 다양성과 가능성은 나를 더 좁게 가둬버리는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다.

다소 복잡하게 들릴 수 있는 뇌의 이야기를 해보았다. 이 글을 읽다가 떠오르는 동료나 상사가 있을 수도 있다. 소위 ‘꼰대’라고 불리는 모습의 특징 역시, 오늘의 논점에 빗대어 얘기하면 자신의 기준과 신념이 절대적이라고 믿으며, 추론을 기정사실화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추론인지를 스스로에게 되물어보기 바란다. 자, 앞으로 당신은 어떻게 다양성을 ‘인지’하면서 살아가려 하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뇌의 이러한 능력과 역할을 어떻게 더 건강하고 풍성하게 활용할 것인가?

쉽게 정리하면 ‘내가’라는 경험과 맥락의 범위, ‘그렇게’라는 나한테 더 편리하고 효율적인 인지의 기준, ‘판단하고 싶은 건지’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인지, 왜곡해서 볼 것인지에 대한 나의 의지를 잘 구분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섣불리 재단하고, 함부로 평가하는 경솔함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호기심으로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비효율적인 것들이 더 인간적이고 낭만적일 때가 있다.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는 우리의 뇌를, 가끔은 낭만과 인간미를 효율적으로 찾는 데 활용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김신혜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