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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보리밭과 꽃양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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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보리밭과 꽃양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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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유월이다. 새삼 세월의 속도를 실감한다. 봄은 기다리느라 더디 오지만 여름은 기다리지 않아도 빠르게 찾아온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발을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숲을 찾지 못했다. 숲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려 이따금 자전거를 타고 천변에 나가 꽃들의 안부를 묻곤 했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아카시아와 이팝나무꽃이 시들고 자전거 도로 옆 산딸나무들이 하얗게 꽃을 피워 오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노랑 코스모스와 선홍의 꽃양귀비가 물결을 이루며 피어 있는 모습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황홀하다. 그 원색의 꽃밭에 홀린 듯 자전거 페달을 밟아 찾아간 그곳에서 보리밭을 만났다. 구청에서 조성해 놓은 천변의 너른 밭에 청보리가 바람을 타고 물결치듯 출렁인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조금씩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앞에 서니 유년의 고향 들녘 풍경과 함께 떠오르는 노래가 가곡 ‘보리밭’이다. 1970년대 가수 문정선이 불러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보리밭’은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였던 박화목이 노랫말을 쓰고 윤용하가 곡을 썼다. 서정성 짙은 노랫말과 부드러운 멜로디가 특징인 이 노래는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이 1951년 피난처인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만나 의기투합해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리는 화본과에 속하는 1년생 혹은 2년생 초본식물로 대맥이라고도 한다. 보리는 세계 4대 작물 중 하나로 우리나라에서는 오곡(쌀·보리·조·콩·기장) 중 하나로 쌀 다음가는 주식 곡물이다. 요즘은 쌀이 풍족하고 식생활이 서구화돼 보리 소비가 줄어들었지만 내 어렸을 적만 해도 가을철 추수한 식량이 다 떨어져 가는 봄이 되면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보릿고개’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리의 생리활성 기능이 재조명되면서 보리를 이용한 가공식품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건강관리를 위해 보리밥 전문 식당을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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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보리밭 사잇길을 걷다 보니 청보리 사이로 붉은 개양귀비가 점점홍으로 피어 있는 게 눈에 띈다. 아마도 보리밭 옆에 조성해 놓은 양귀비 꽃밭에서 꽃씨가 날아든 모양이다. 약을 구하기 쉽지 않았던 예전에는 원래의 양귀비에는 마약 성분인 아편이 들어있다. 하지만 양귀비를 보리밭 사이에 몰래 심어 배앓이를 할 때 민간요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양귀비와 구분하기 위해 꽃양귀비로도 불리는 개양귀비에는 아편 성분이 없어 우리는 쉽게 양귀비를 만나고 꽃이 지닌 아름다움을 오롯이 맘껏 즐길 수 있다. 보리밭 속의 양귀비가 어여쁘기는 해도 모여 피는 꽃들이 더 아름다운 법, 나는 천천히 양귀비 꽃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홍의 양귀비꽃 사이로 자잘한 흰 안개꽃이 피어 있다. 안개꽃이 배경이 되어 양귀비의 붉음이 더욱 선명해진 듯하다. 유월의 태양 아래 불타는 양귀비 꽃밭의 열기 때문일까. 꽃밭 사이로 산들바람이 인다. 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는 꽃잎과 꽃 사이를 나는 나비들의 날갯짓이 마냥 한가롭기만 한데, 꽃밭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만 분주하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꽃밭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때로는 꽃에 가까이 다가가 향을 맡기도 한다.

꽃의 화가로 불리는 미국의 조지아 오키프는 “아무도 진정한 자세로 꽃을 보지 않는다. 꽃은 너무 작아서 꽃을 보는 데 시간이 걸리는데 현대인은 너무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다”고 했다. 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꽃을 보고 있으면 보는 이의 영혼도 맑아진다. 사람이 팍팍할수록 꽃을 보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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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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