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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한국, 미국의 '4000억 달러 투자' 요구에 고위급 협상 '올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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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한국, 미국의 '4000억 달러 투자' 요구에 고위급 협상 '올스톱'

8월 1일 관세 시한 코앞…日·필리핀 등은 서둘러 타결하며 대조
美, 2+2 회담 등 일방 취소로 압박…패키지 딜 수용 여부 주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월 25일(현지 시각) 스코틀랜드 프레스윅의 글래스고 프레스윅 공항에 도착해 기자들에게 발언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 4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패키지를 요구하며 협상 압박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고위급 통상 협상이 멈춰 선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주목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월 25일(현지 시각) 스코틀랜드 프레스윅의 글래스고 프레스윅 공항에 도착해 기자들에게 발언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 4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패키지를 요구하며 협상 압박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고위급 통상 협상이 멈춰 선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주목되고 있다. 사진=로이터
미국의 8월 1일 관세 부과 시한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한·미 무역 협상이 막판 난기류에 휩싸였다. 일본·필리핀 등 다른 파트너국들이 지난 7월 22일과 23일 사이 잇따라 협상을 타결한 것과 달리 한국은 고위급 회담이 줄줄이 취소돼 협상 결렬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고 스트레이츠타임스가 27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미국은 큰 규모의 투자와 규제 완화를 담은 일괄 타결안을 압박하고 있어 남은 기간 양측이 극적인 돌파구를 찾을지 앞으로의 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7월 25일로 잡혔던 한·미 '2+2' 경제장관 회의는 갑자기 무산됐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과 구윤철 신임 기획재정부 장관은 미국의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 만날 예정이었으나 미국이 베선트 장관의 "긴급한 일정 충돌"을 이유로 들며 이메일로 취소를 통보했다. 일부 언론은 베선트 장관이 같은 날 간킴용 싱가포르 부총리를 만났다고 보도했다.

앞서 7월 21일에는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만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으나 루비오 장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긴급 호출을 받으면서 헛걸음을 했다. 외교·안보 경로로 경제 협상을 보완하려던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 잇단 회담 무산…노골적인 '한국 압박'


잇따른 회담 취소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압박 전술'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카네기 멜런 전략기술연구소의 트로이 스탠거론 비상임 연구위원은 "회담 취소는 협상 시간을 줄여 한국을 압박하려는 뜻이 뚜렷하다"면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는 나라가 늘수록 한국이 협상에서 설 자리는 좁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의 압박 수위는 높다. 한국과 같은 제조업 강국인 일본은 미국산 쌀·자동차 수입을 늘리고 5500억 달러(약 761조4750억 원)라는 큰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해 관세율을 기존 25%에서 15%로 낮췄다.

미국의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지난 7월 24일 CNBC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의식하기에 일본과의 협상 소식을 들은 한국에서 욕설이 터져나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며 한국이 협상을 "매우" 원한다는 사실을 안다고 내비쳤다.

한국은 안으로도 여러 악재에 발목이 잡혔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사태 뒤 6개월간 이어진 정치 공백으로 귀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국 수도에 대사가 모두 없는, 전례 없는 '외교 공백'까지 겹쳐 협상이 어려워졌다. 지난 6월 4일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수출 경제에 미칠 충격을 줄이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 '4000억 달러 투자' 요구에 꽉 막힌 협상


한국 정부는 최근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통해 수정 제안을 미국에 전달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한국은 1000억 달러(약 138조4500억 원) 규모의 기업 투자와 쇠고기·쌀 수입 규제 완화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훨씬 웃도는 4000억 달러(약 553조8000억 원) 규모의 투자와 에너지 수입 확대, 자국 디지털 서비스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 등을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의 투자 규모와 조건, 반도체·방산 같은 산업별 협력 방안이 이번 협상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한국이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 파트너 나라 가운데 최대 투자국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게도 협상에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해마다 약 250억 달러(약 34조6125억 원)를 투자하는 최대 투자국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추가로 투자할 힘이 크지 않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스탠거론 연구위원은 "한국이 일본만큼 많은 투자를 제시할 수 없으니 투자의 질에 힘써야 한다"면서 "한국이 강한 반도체와 조선업을 살리고, 일본이 내놓지 않은 원자력 발전과 방위산업 협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어두운 전망 속에서도 타결 가능성은 남아있다. 백악관 관계자는 최근 "생산적인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밝혀 협상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영국·유럽연합(EU)과의 무역협정 조정을 앞두고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낮은 관세를 매길 것"이라면서 "다른 나라들을 해치고 싶지 않다"고 말해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조지 H. W. 부시 미·중관계재단의 이성현 선임연구원은 "이제 초점은 협상 타결 여부에서 공식 발표 때 최종 조건이 어떤 모습일지로 옮겨가고 있다"며 막판에 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관세가 발효되는 8월 1일까지 남은 날은 며칠뿐이다.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은 여전히 있지만 빠듯한 일정 속에서 한국 정부가 막판 협상력을 어떻게 끌어올릴지에 모든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